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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사이다 Sep 23. 2020

엄마 선생님

  2020년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단언 '코로나'라고 할 수 있겠다. 코로나로 인해 평범한 가정주부이던 내 삶에도 작은 돌이 하나 던져졌다. 나는 초2 딸과 7살 아들을 돌보는 엄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 격으로 교회 방과 후 학교에서 중학생 아이들 수학을 가르친다. 코로나가 던진 작은 돌 중 하나는 나의 정체성의 변화다. 

 나는 엄마다. 아이들을 아침에 깨워 밥을 차려주고, 학교에 보내고 나서 혼자 갖는 짧은 시간이 나에게는 꿀이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엄마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역할을 해야 한다. 아직 초2인 둘째 딸은 혼자 온라인 수업과 가정 학습을 겸하여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내가 도와줘야 한다. 온라인 클래스를 틀어주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학습 꾸러미 푸는 것을 도와주며 혹시나 장기적인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학습 결손이 생길까 평소에 시키지 않던 문제집도 푼다. 물론 모르는 부분은 내가 도와준다. 사건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자의적 타의적으로 나는 선생님의 역할을 겸하게 되었고 이로써 나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첫째 아이는 다른 학습 사교육은 그동안 없었던 터라 처음에는 엄마와 하는 공부를 즐거워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내 목소리는 높아지고, 쉬운 문제도 풀지 못하고 실수를 반복하는 모습에 화를 낸 적도 있다. 아이의 학습태도를 지적하며 공부 분위기가 안 좋아졌던 적도 당연히 있다. 이런 상황이 날마다 반복되다 보니 첫째와 나 사이의 작은 틈이 벌어졌다.

  아이에게 화를 내고 나서는 항상 후회하게 된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가 그럴 것이다. 아이와 사이가 안 좋은 상황에서 내가 가르치는 중학생 아이들 수업을 하게 되는 날들이 생긴다. 중학생 아이들 수업도 요즘은 줌에서 한다. 내가 가르치는 친구는 학습 역량이 뛰어난 친구는 아니라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야 한다. 내 자식이 아닌 다른 아이를 가르치면서 다시 한번 내 딸에게 미안해진다. 먼저 기분이 안 좋더라고 얼굴 근육을 풀고 최대한 밝게 수업한다. 그리고 문제를 풀다가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내가 잘못 설명하나 싶은 생각에 오히려 더 좋은 수업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쉬운 기초 부분 실수를 반복하면 나는 혹여나 자신감이 떨어질까 '괜찮아, 할 수 있어'라고 격려하며 수업을 한다. 이 얼마나 상반되는 모습인가. 내 아이를 가르칠 때도 이렇게만 한다면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텐데 왜 내 자식의 문제 앞에서는 답답함이 먼저 올라오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옛말에도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나오나 보다. 내 자식을 가르치면서 딸아이의 부족한 부분에 화를 내지만 결국에는 화를 내버리고 마는 내 모습에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코로나 사태가 빨리 진정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엄마는 그저 엄마로 살기를 원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가족 간 거리는 좁아지고,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을 서로에게 너무 많이 보여주면서 그만큼의 상처를 주고받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다시 한번 성찰하게 된다. 나는 엄마다. 선생님이 아니다. 나는 내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내가 사랑을 주면 아이들은 자랄 것이다. 

  드디어 주 2회 이긴 하지만 이번 주부터 아이들이 등원을 한다. 등원을 한다 해도 엄마가 챙겨야 할부분은 아직도 많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갖게 되는 혼자만의 시간에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글을 쓸 수 있어 다행이다. 특히 글을 쓰는 일은 일종의 수행이다. 나를 되돌아보고 정화된 모습으로 아이들을 맞을 수 있는 창구가 된다. 

 오늘도 역시 다시 한번 깨닫는다. 언제나 나를 자라게 해주는 가장 좋은 스승은 내 아이들이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할 것이 아니라 가끔은 내 아이보기를 남의 아이처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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