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시집

시의 문턱을 낮춰준 문단계의 아이돌, 박준 시인의 시집

by 파일럿
박준 (1).png


독서모임 덕분에 처음으로 시집을 읽게 됐다. 모임 당일 가장 마음에드는 시 한 편을 낭독하기로 했었는데, 모임 직전까지 내 마음에 와닿는 시를 고를 수 없었다.


내가 느끼는 문학작품의 가치는 직접 체험하지 않고도 작품 속 인물들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들을 이해하게 되는데에 있었다. 한 작가의 시집을 읽다보니, 어떤 시에서는 화자가 다르기도 해서 대체 어떤 인물을 이해해야 하는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나에게 해석의 여지가 너무 크다는 것이 오히려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됐다. 시집을 읽는 내내 '그래서 이 화자는 어떤 상황에 처했고, 어떤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며, 어떤 교훈을 주려고 하는거지?' 에 집중해 추리하듯 시를 읽어 피곤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중간쯤 시집을 덮었다. 글과 언어가 주는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제 가졌던 독서모임에서 시를 좋아하는 분들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를 낭송하면서, 어떤 부분들이 좋았는지 이야기하는 감상을 듣고 나서야 '시는 그냥 음미하면 되구나, 정해진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되구나, 시구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구나' 라는걸 깨달았다.


언어를 표현하고, 마음을 전하는 것 그 자체의 가치.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남편은 세포 대부분이 논리와 이성으로 가득 찬 대문자 T라, 우리가 다툴 때면 나의 흔한 레파토리는 '너의 말의 뜻이 아니라, 전달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거야'인데, 알고보니 나는 시집을 T 처럼 읽고 있었던 것이다.


글쿠나.. 그냥 음미하고 느끼면 되구나.

시인이 적은 글자들로, 내 마음에 조금의 동요나 물결이 일면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구나. 정해진 답이 있는게 아니구나.


시집의 마지막에 평론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시인과 시에 대해 애정을 가진 평론가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이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발문을 보며 많은 울림을 받았다. 이 분이 박준이라는 시인을 얼마나 아끼는지, 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한글로 된 문학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오롯이 느껴졌다.


책 중에서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김소월 - 개여울 - 부분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김영랑 - 내 마음 아실 이 - 부분

잘 알려진 대로, 북에 소월, 남에 영랑이라고 불린, 한국 서정시 어법의 기원에 해당하는 두 시인의 시다. 김소월은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 있는 이에게 "왜 그러고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고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라고 붇는다. "그리합니까?"가 운율 때문에 글자 수를 줄이다 보니 생긴 결과라 할지라도 그 덕분에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그에 꼭 필요한 연민 어린 조심스러움을 얻게 됐다. 김영랑은 '내 마음을 나만큼이나 잘 아는 사람'을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라고 표현했다. '나만큼'이나 '나처럼'이 아니라 '날같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백 년간 한국 시를 읽어온 이들의 마음이다. 소월과 영랑의 이런 선택 속에 무슨 형이상학이나 정치사상이 담겨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 시를 쓰고 읽는 이들의 공동체는 이런 작은 차이의 가치를 함께 알아보는 뿌듯함으로 움직인다. 박준의 희소한 가치는 그가 같은 세대의 시인들 중 드물게도 모국어의 이런 역사적 심미성을 귀하게 여긴다는 데 있다.

한때 많이 읽히다가 이젠 거의 잊힌 시학의 근본 개념이라는 책에는 서정의 근본 형식이 '회상'이라고 적혀 있다. 단지 돌아본다는 의미만은 아니고, 돌아볼 때 발생하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거리 소멸, 즉 서정적 융화가 시의 본령이라는 것이다.

방금 우리는 박준의 시간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과거는 더 먼 과거로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지금 이곳으로 거슬러 올라온다는 것이 그의 시간관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잇달아 해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과거가 현재로 이어져오는 것이라면, 지금의 이 현재도 언젠가 미래로 이어져갈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 시인이 살아가는 시적 시간에는 두 층위가 있는 것인데, 그는 현재로 오는 과거를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미래에 도착할 현재를 정성껏 살아가기도 해야하는 것이다. 전자를 회상이라 불렀으니 후자를 예감이라고 불러야 할까.

현재가 미래에 도달할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곧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준비하는 삶을 산다. 미래를 내다보는 일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 나는 바로 여기에 박준의 '나'의 비밀 중 하나가 잠겨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를 살면서도 미래를 염두에 두는 마음은 현재를 미래에 선물로 주려는 마음이다. 누구에게? 그는 과거에서 건너오는 것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니, 미래의 자신을 위해 현재를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현재 내 삶의 어떤 순간순간이 미래의 시가 된다는 마음, 시인인 내가 미래에 일용할 양식을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다.

내가 처음 적은 답장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박준 - 장마 - 부분

이 시에서 그는 편지를 두 번 쓴다. 우리의 삶이 이미 일어난 아픈 일들을 잊지 않는 삶이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가 함께 있을 시간들에 대한 예감으로 버텨내는 삶이기도 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돌봄이란 무엇인가.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그가 걷게 될 길의 돌들을 골라내는 일이고, 마음이 불편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그를 아프게 할 어떤 말과 행동을 걸러내는 일이다. 돌보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 번 살고 그것을 당신과 함께 한 번 더 사는 일.

그런데 여기서 덧붙여야 할 것은 돌봄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돌봄을 받는 너는 알도록 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일의 따뜻함까지도 돌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 - 책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