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사용하는 모든분이 읽어보면 좋겠다
요즘 대화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다. 이전엔 대화를 하는 이유는 문제 해결이나, 설득, 또는 어떤 변화나 개선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화 당사자 두 사람 모두 비슷한 분량으로 대화에 참여하고, 주제를 벗어나지 않게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대화는 상대방과 '연결'되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기존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나가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이런 생각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관점의 변화를 가져왔다.
내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어떤 표현을 했더라도, 상대방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나의 표현을 점검해봐야 한다. 특히 내가 애정하는 상대방이라면 더욱 더.
주제를 벗어난 대화를 하더라도 괜찮다. 상대방은 주제를 벗어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고, 그 이야기를 내가 들어줬으면 하는 것이므로 나는 들어주면 된다. 꼭 문제를 해결해줄 필요는 없다.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된다.
대화의 형식이 크게 중요하진 않다.
이 책의 작가는 인간 공통의 머리구조인 논리에 대해 설명한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나오는 개념들을 지금 상황에 맞게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책을 읽고 나면 한결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다. 얼핏 보면 생각, 논리를 펴나가는 과정에는 이런 원칙이 있다, 이렇게 해야한다 - 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책의 가장 중요한 대전제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의견이란 참 혹은 거짓이 아니라 참과 거짓이 섞인 조성물이다"
"설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 이다."
생각과 의견을 설득력있게 개진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하며 매듭짓는 친절하고 따뜻한 책. 한글로 이런 책이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한글을 쓰는 누구에게나 추천한다.
사람들의 견해 차이와 논쟁의 본질은, 사실 판단(팩트 체크)의 차이에서 벌어진다기보다는 결국 대전제의 차이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대전제가 흔들리지 않는 한, 주장도 흔들리지 않는다.
글쓰기란 표상을 생각으로 바꾸는 언어 활동이다. 그래서 글을 쓰다 보면 의도치 않게 적절한 단어들이 나타나는 체험을, 내가 썼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멋진 문장이 나타나는 체험을, 문장을 쓰면서 자기 생각이 정리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글쓰는 과정과 거의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매우 빠르게 표상을 생각으로 바꾸는 판단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개연성이 바로 probability이며, 그것의 다른 말이 '확률'이다. 과거 진리는 infallibility였다. 오늘날 진리는 probability 이다. 지식이란 어느 정도 참이며 어느 정도 거짓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런 통찰은 서양정신사에서, 종교와 정치에서, 문화에서, 아주 최근에 이루어진 지적 성과다. 인간의 의견이란 참 혹은 거짓이 아니라 참과 거짓이 섞인 조성물이다.
글은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지, '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를 안다는 것은 '파악되지 못한 나'에 대한 오만이며 불명예다. 내가 아닌 내 페르소나가 글을 쓴다고 해서 진정성이 부족해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글이기 때문에, 진정성이 어딘가로 도망가지 않는다. 진정성 문제는 내 생각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표현할 때 생기는 것이다. 페르소나는 나의 단편이며, 표현된 생각은 나의 것이다. 단지 그것이 내 전부가 아닐 뿐이다.
논리의 연결이 강하지 않은 근거는 잘라내기: 어떤 결과가 발생한 이유를 탐구하는 상황에서, 원인과 배경이 섞여 있다면, 배경을 가위질로 잘라낸다.
어떤 단어를 머릿속에 보관할 때에는 가능한 한 선명한 의미로 보관하기.
내 대전제를 의심하고, 세상에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자.
글을 쓰면서 표상을 생각으로 바꾸고, 오류를 되새김질하며 성장하자.
어느 진보파가 개인적으로, 깊은 통찰력과 인품을 지닌 어느 보수파의 진정 어린 이야기를 경청하는, 경청해야만 하는 경험을 갖는 경우, 마찬가지로 어느 보수파가 개인적인 만남으로, 날카로움과 넉넉함을 겸비한 어느 진보파의 깊은 이야기를 경청하는, 경청해야만 하는 경험을 갖게 된 경우, 그때의 충격량은 기존 대전제의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평소의 자기 생각과는 너무 낯선 체험을 하고,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낯선 체험을 통해 대전제가 흔들리거나 대전제들의 우선순위가 바뀌거나 새로운 대전제가 생성되는 만큼 생각의 폭이 달라지고, 그러므로 이런 인상적인 체험을 한 사람의 머릿속 변화의 기울기는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 비해 더 커질 것이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다. 생각이 바뀌든 태도가 변화하든 다양성과 포용성이라는 머릿속 개념이 더 강한 우세력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논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언어를 내 머리 안에서 재현할 수 있습니다.
근거의 기울기를 생각하자. 근거가 자연스럽게 주장을 향한다면, 그것이 바로 근거의 기울기가 높은 좋은 논리다.
인간은 세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전부를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확신하거나 주장해서는 안 된다.
생각의 집합이 너무 달라서 교집합이 없다면 생산적인 토론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흘러가는 대로 인생을 살기보다는 더 나은 인생을 원하며, 불행보다는 행복을 희망한다. 만약 더 나은 인생과 더 행복한 삶이 사회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타인과의 관계가 좋아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타인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고, 마찬가지로 타인이 나를 더 납득해 주는 것이 요청된다. 그래서 논리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더 잘 생각하고, 더 잘 말하고 쓰고, 더 잘 듣고,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논리를 공부한다.
설득을 위해서는 반박을 견디고 재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반박을 받고 쉽게 무너지는 주장은 안 하니만 못하다. 주장 자체가 잘못되었다거나 주장 자체를 반박받았다기보다는, 대체로 반박될 만한 근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한다.
단어의 기능은 의미의 윤곽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동적인 활동은 머리 바깥 세상에 유적과 문화와 지식을 남긴다. 그뿐 아니라 머릿속 개념에도 역사의 흔적을 남긴다. 과거 인류의 머릿속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의 크기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 크기가 작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인류의 머릿속에서 그 개념은 과거 인류와 달리 아주 크다.
- Wet'suet'en 분들과의 시간은 내 머릿속에 '인권' 이라는 개념의 크기를 키우고, 선명하게 만들었다.
어떤 단어의 의미를 지나치게 크게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남보다 더 애쓰면서 소통해야 한다. 꿈꾸며 사는 사람은 공감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사람은, 생각에 맞게, 상황에 맞게, 적절한 의미 크기를 갖는 개념을, 즉 그런 단어를 머릿속에서 선택한다. 그런 선택 능력이 바로 어휘력이다.
어떤 단어를 머릿속에 보관할 때에는 가능한 한 선명한 의미로 보관하는 것이 좋다.
판단하지 않은 것을 생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표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논리적인 사람과 표상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화가 잘 안 된다. 토론은 더욱 안 된다. 전자는 연결된 개념을 위주로 이미 머릿속에 자리잡은 생각을 꺼내면서 신중하게 대화하고, 후자는 생각을 실시간으로 만들어가면서 신속하게 대화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 답답할 것이다.
- 엄마와 나!!
- 이것도 상대적인 것이고,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사람은 자기 오류를 바로잡을 때, 질적으로 성장한다. 만일 표상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판단이 내려진 게 아니기 때문에, 바로잡을 오류가 없다. 결국 표상에 머무를 게 아니라, 설령 오류라 할지라도 스스로 판단하여 생각으로 나아가는게 그 사람의 성장에 이롭다.
과거 어딘가에서 보관된 대전제가, 지금 여기에서의 판단을 매개로, 추론하는 주장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해 버리기 때문에, 인간 행동은 단순히 지능의 지배가 아닌 이성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모든 판단이 근저에는 보편이 있다. 인간은 아무렇게나 판단하지 않는다. 설령 이상한 판단이라 해도 그 판단의 토대에는 항상 보편이 있다.
만약 우리가 전혀 다른 성향, 경험,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소통을 하고자 한다면, 성향, 경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그 혹은 그녀가 자기 논리의 대전제로 삼는 개념이나 원리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걸 우리가 모를 수 있다. 소통의 열쇠는 그 사람의 대전제를 제대로 추측하는 데 달려 있다.
그이의 대전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너무 강한 주장을 하지 않는 게 좋다.
약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게 좋다. 다른 근거의 설득력을 없애는 모순되는 근거를 제시하기도 한다. 근거를 제시하기 전에 과연 그 근거가 다른 근거와 모순되지 않는지를 섬세하게 검토해야 한다.
소전제의 사실 판단 (fact check)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다. 설령 다르더라도 교정하는게 어렵지도 않다. '그거 사실이 아닌데요?'라고 누군가 지적하면, '아, 그렇군요'라고 답하면서 바로 정정할 수 있다. 하지만 소전제 판단을 정정했음에도, 대전제가 우세력을 갖는 한, 결론은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사람들의 견해 차이와 논쟁의 본질은, 사실 판단 팩트 체크의 차이에서 벌어진다기보다는 결국 대전제의 차이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대전제가 흔들리지 않는 한, 주장도 흔들리지 않는다.
연역추론에서 나타난 결론이 머릿속에서 연결 없이 고립될 리 없다. 결론은 끊임없이 피드백돼서 새로운 대전제가 될 수도 있다. 이리하여 인간은 연역 프레임속에서 생각을 통해 많은 원리를 생각해 내는 것이다. 연역추론 자체는 간단한 논리 구조이지만, 덕분에 인간은 지식을 확장할 수 있다.
경험이 다르다면 대전제도 다를 가능성이 크다. 연역추론에서 대전제는 인간 지식의 최종 병기이자, 모든 오류의 서식지다.
귀납추론도 지금 여기의 판단에서 생각의 도약을 낳기 때문에 추론이다. 다만 연역추론과 달리 대전제가 없다. 연역추론은 대전제를 이용해서 주장하기 위한 추론이다. 반면 귀납추론은 그런 대전제를 찾기 위한 추론이다.
자기 머릿속에서는 교정이 안되기 때문에, 머리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내가 직접 관찰하고 경험할 수 없다면, 과학자들이 혹은 전문가들이 관찰하고 연구한 결과를 통해 가넙적으로 귀납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개인 행동이 독서이다.
우리가 독서하는 까닭은 저자의 견해와 주장을 듣기 위함이다.
글을 쓸 때는 타인이 다르기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문장과 문장의 연결을 점검해 나간다. 근거와 주장 관계가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도 납득되도록 쓰는 글, 그것이 논리적으로 훌륭한 글이다.
글쓰기란 표상을 생각으로 바꾸는 언어 활동이다. 그래서 글을 쓰다 보면 의도치 않게 적절한 단어들이 나타나는 체험을, 내가 썼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멋진 문장이 나타나는 체험을, 문장을 쓰면서 자기 생각이 정리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글쓰는 과정과 거의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매우 빠르게 표상을 생각으로 바꾸는 판단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 정말 공감! 일기를 쓰고, 블로그를 쓰고, 글을 쓰는게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글은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지, '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를 안다는 것은 '파악되지 못한 나'에 대한 오만이며 불명예다. 내가 아닌 내 페르소나가 글을 쓴다고 해서 진정성이 부족해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글이기 때문에, 진정성이 어딘가로 도망가지 않는다. 진정성 문제는 내 생각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표현할 때 생기는 것이다. 페르소나는 나의 단편이며, 표현된 생각은 나의 것이다. 단지 그것이 내 전부가 아닐 뿐이다.
평범한 경험의 충격량은 자기 머릿속 대전제를 흔들 정도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의 전환, 정신적 거듭남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어려운 현상이다. 대부분의 경험은 편견을 강화하는 데 봉사할 뿐이다. '유유상종'이라는 사자성어는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귄다는 의미다. 이 말은 비슷한 대전제를 갖고 있는 사람끼리 교류한다는 뜻으로 비쳐진다. 만약 서로 공통 대전제를 갖고 있다면, 다른 직업, 다른 소속을 갖고 있어서 경험의 내용이 다르더라도, 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경험의 충격량은 그들의 공통 대전제를 흔들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기존 대전제를 강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변하지 않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어느 진보파가 개인적으로, 깊은 통찰력과 인품을 지닌 어느 보수파의 진정 어린 이야기를 경청하는, 경청해야만 하는 경험을 갖는 경우, 마찬가지로 어느 보수파가 개인적인 만남으로, 날카로움과 넉넉함을 겸비한 어느 진보파의 깊은 이야기를 경청하는, 경청해야만 하는 경험을 갖게 된 경우, 그때의 충격량은 기존 대전제의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평소의 자기 생각과는 너무 낯선 체험을 하고,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낯선 체험을 통해 대전제가 흔들리거나 대전제들의 우선순위가 바뀌거나 새로운 대전제가 생성되는 만큼 생각의 폭이 달라지고, 그러므로 이런 인상적인 체험을 한 사람의 머릿속 변화의 기울기는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 비해 더 커질 것이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다. 생각이 바뀌든 태도가 변화하든 다양성과 포용성이라는 머릿속 개념이 더 강한 우세력을 발휘한느 방향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수많은 경험을 한 실력자가 경험을 통해 자기 대전제를 의심하게 되었고, 세상에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실패와 오류를 되새김질해 온 경우에, 만약 그런 사람에게 질문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지언정, 상황과 시대와 사람이 다를 것이라면서, 명령과 간섭과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이 실력자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현자에게 가까이 가서 더 많은 조언과 가르침을 구한다.
단어를 선명하게 머릿속에 보관하는 사람이야말로 경험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사람이다.
우연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지닌 진화론은 - 어떤 우연적인 사건이 일어나 필연적인 진화를 일어켰다는 논리로 - 아예 우연을 학문의 필수 요소로 삼는다. 진화생물학이 유추하는 지식을 진리의 대전제로 삼아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해 어떤 주장을 연역하려는 경우, 유추의 한계는 - 더 이상 과학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 두드러진다.
- 자연스러운 것은, 우연한 것이지, 그게 어떤 것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
유추는 더 쉬운 지식, 즉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더 어려운 지식을 설명한다.
인공지능 기술의 논리 구조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설명하는 이성의 논리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사실 판단은 대전제와 결론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대전제가 결론을 주도하고, 부족한 근거 자료는 유추로 채워버리기 때문에, 근거의 단편만으로도 추론이 가능해진다.
오류는 인간의 인간적인 특징이다.
진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학문과 사회적 소통의 영역에서는 유추를 하더라도 겸손함이 필요하다. 한편 경험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지식이라면, 유추를 하지 말고, 직접 경험해야 한다.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음에도 유추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이 게으르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경험할 수 없으니까, 경험하기 힘드니까 유추 논리를 사용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유추에 기반한 지식을 진리인 것처럼 지나치게 확신하거나 너무 강하게 주장하기보다는 경청할 만한 견해로 여기자.
개연성이 바로 probability이며, 그것의 다른 말이 '확률'이다. 과거 진리는 infallibility였다. 오늘날 진리는 probability 이다. 지식이란 어느 정도 참이며 어느 정도 거짓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런 통찰은 서양정신사에서, 종교와 정치에서, 문화에서, 아주 최근에 이루어진 지적 성과다.
- 인간의 사기적인 특성. We build on our greatest ancestors' findings.
우리가 우리 머리 안의 지식을 참과 거짓의 짬뽕, 오류와 진실의 혼합물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과거 인류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한 차원 높은 존재, 즉 포용성과 다양성을 겸비한 인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완전무결함에 묶여있던 과거 인류는 포용성이 적었으며 좀처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자연계를 이루는 기본 입자는 '있다'라는 사실만 알려줄 뿐,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에 관한 내용은 알려주지 않는다. 인간은 그 기본 입자를 관찰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그것들이 확률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자연계를 이루는 기본 입자가 이러할지니, 결국 자연계 자체의 완전무결함도 승인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자연계조차 완전무결함을 상실한 상황에서, 세상의 이치라면서 논리를 완벽한 원리로 삼으려는 모든 시도는, 즉 인간계에서 완전무결함을 차증려는 모든 환상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머릿속에서 옳고 그름을 너무 고집하지 말기로 하자. 당신의 오류는 꽃일 수도 있다. 여유를 갖고 과감히 생각하되, 상대방을 더 폭넓게 이해하면서 소통하기로 하자.
- 왜냐면 대화와 소통의 목적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연결이니까.
데이터를 머릿속에서 처리하기 = sensing
감각 자료를 수용하는 능력이 높은 사람 = sensitivity 감수성이 높은 사람
대상으로부터 이성까지 이어지는 구조를 탐구하는 학문이 인식론이다. 인식론과 논리학의 차이는 제1 요소가 포함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다. 인간 머리 구조 안에 감수성의 기능이 포함되면 인식론이고, 포함되지 않으면 논리학이다.
우리 개개인의 머리는 실로 타인의, 권력자의, 대중의, 종교의, 관습의 이성 원리에 종속돼 있기 떄문에, 과감하게 생각 못하게 되는 것이다.
- 특히 한국, 일본과 같은 고맥락 사회에서는 더욱 더
그래서 그런 종래의 이성 원리를 가위로 잘라내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이성 자체를 부정하는 시도는 아니었다. 사람들의 머릿속 대전제를 장악한 기존 원리의 권세를 부정하는 도전이었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서 나의 의지가, 나의 정신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강조하는 철학이 생의 철학이었다. 단독자의 의지, 단독자의 힘, 단독자의 영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이런 철학을 전개한 사상가로 쇼펜하우어, 니체, 키르케고르를 알고 있다.
- 독일 철학자들!! 그래서 내가 이들을 무척 좋아하는구나...
언어철학
인식론이 등장한 이후, 진리에 관한 한, 인간의 생각은 믿을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대전제가 확약하는 한, 토론에서 각자의 결론적 주장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전자가 있기 떄문에, 그 관전자의 지지를 받기 위해 반론의 힘을 사용한다. 이것이 바로 공론장이 기능하는 모습이다. 다수결의 원칙이나 여론의 위력이 존재하는 어느 곳에서든 근거들에 대한 논박은 의미가 있다(설령 당사자 사이에서는 의미가 없더라도)
효과적인 토론을 끝내는 방법은 양쪽 대전제에 대한 양비론 격으로, 새로운 원리의 가능성을 거론하며 물러나거나 대결을 봉합한다. 예컨대 종교적 대립에서는 인류애를 언급하면서 물러나고, 진보와 조수의 정치적 대립에서는 국민통합의 중요함을 말한다거나 무엇이 다음 세대에 이로운 것인지 앞으로 더 논의해 보자고 말하면서 갈라진 감정을 봉합하고, 부동산 투자냐 투기냐의 논쟁에서는 수도권 집중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균형 발전을 도모할 필요성 같은 논리를 펼치면서 후퇴하는 것이다.
수사학의 3요소
- 논리: 로고스
- 심리: 파토스
- 태도: 이토스
이 세 가지 요소 중, 타인을 설득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논리가 아니라 태도이다. 내용에 걸맞은 형식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에토스다.
기계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의 답답함 - 본인이 그렇게 느끼든 타인이 그렇게 평가하든-은 집합의 크기가 작기 때문이다.
좋은 토론 문화는 당사자에게 달려있지 않다. 관객이 이것을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므로 한 사회의 토론 문화의 성숙도를 가느하는 시금석은 관전자의 관찰력이다. 모든 토론은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결국 관전자의 문해력이 토론 문화를 결정한다. 관전자가 공격자의 나쁜 공격을 '나쁘게' 인식하고 반응한다면, 토론의 당사자들은 나쁜 수단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관전자들이 선동에 의해 당사자로 변질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정말이지 쓸쓸한 일이다.
그것이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 생각의 집합을, 다시 말하면 연결할 것들의 집합을 먼저 정한다. 그리고 생각의 집합 바깥에 있는 것은 연결에서 배제한다. 강한 연결만 남기고 약한 연결은 버린다. 가위질로 약한 연결을 잘라내지 않으면 전체의 논리력이 훼손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약한 연결은 타인의 머릿속에서 끊어진다.
우연은 (나에게 불리한) '다른 연결'을 배제하지 못한다. 필연이 없고, 우연만 있다면 개연성 평가를 해야 한다. 우연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몇 가지 우연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버린다. 그 우연이 어째서 확률이 높은지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라면, 자세히 설명한다. 애써서 설명하되, 우연을 필연처럼 보이게 과장하지는 않는다.
어떤 결과가 발생한 이유를 탐구하는 상황에서, 원인과 배경이 섞여 있다면, 배경을 가위질로 잘라낸다. 왜냐하면 배경이 원인과 결과의 강한 연결을 약화시키고 당신의 논리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배겨오가 원인이 함께 병렬로 나열되어 있으면, 배경에 대한 반감 떄문에 원인과 결과의 연결도 약화된다. 배경은 어떤 결과의 원인일 수도 있지만, 그 결과가 아닌 다른 결과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기라도 하면, 그것은 더 이상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주장 자체의 설득력을 떨어트리고, 결과적으로 실제 원인조차 그 겨로가의 원인으로서 정당하게 취급되지 못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는다. 배경을 둘러싸고 서로 타당성 논재응ㄹ 하느라 바빠서 정당한 원인에 대한 주목과 관심이 적어지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이 나와 같다면, 즉 상대방도 그 배경을 원인으로 취급해 준다면, 인과관계의 연결이 약화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고, 그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다면 더 강하게 인과관계로 묶인 연결이 이미 있으므로, 반론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배경은 잘라내는 것이 좋다.
비교 논리를 잘못 사용하면, 상대방의 머릿속 논점은 내 주장의 타당성에서 비교 논리의 타당성으로 바뀐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타당한 근거들을 주장과 강하게 연결했더라도, 비교 논리에 대한 상대방의 거부감 때문에, 내 논리 전체의 연결이 약해져 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