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작가가 고전을 통해 어떻게 위로받는지 알아보며, 나도 위로받는 책
다른 사람이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들어보는 경험은 늘 즐겁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 다름이 새롭고,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공감하는 즐거움이 있다. 우리 시대에 잘 알려진 지식인이자 사회운동가, 그리고 과거 정치인이었던 유시민 작가가 선별한 고전들과 그에 대한 감상을 엮은 책. 쉽게 읽히고, 작가에 대해서 더 깊게 이해하게 해주며, 책에 나오는 세계적인 고전들을 한국적인 맥락을 더해 해설해줘서 각 고전들을 읽기 전, 입문용으로 읽기에도 좋은 책이다.
내가 좋아하는 생각들 - 변이, 다양성, 이야기의 중요성, 편향, 가치, 성찰 - 등에 대한 내용이 많아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 위해 정치를 했다가, 지금은 지식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것이 본인의 역할이라 생각하며 글을 쓰는 작가가 된 유시민 작가. 책을 통해 그가 정치를 하며 느꼈을 분노와 후회, 실망의 감정이 얼마나 깊었을지 조금이나마 느껴졌고, 그의 지금의 행보가 너무나 이해된다.
-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똑같이 노출되어 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다르다. 인습적 사고와 행동방식을 바꾸는 데 민감하고 능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둔감하고 소극적인 사람도 있다. 전자는 진보적이고 후자는 보수적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더 유연하게 인습적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교정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일까?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자신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사회제도에 대해 더 넓고 깊게 이해하고 성찰하는 지성적인 사람일수록 더 유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뇌 활동이 활발하고 많이 배우고 다양한 문화를 폭넓게 경험한 사람일수로 더 진보적일 수 있다고 본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평균적 지성과 성찰 능력도 더 높이 발전하며, 제도의 진화 역시 그만큼 빠르고 수월해진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었다.
- 이 책을 주면서 사랑하는 딸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은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이며,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길에서라도 스스로 인간다움을 잘 가꾸기만 하면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주면서 사랑하는 딸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은 죽을 때까지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은 이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러 온 존재이며,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길에서라도 스스로 인간다움을 잘 가꾸기만 하면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기에 살러 온 존재. Life is to live out and to live fully.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따지는 것은, 악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떤 연역적, 논리적인 추론의 산물이 아니다.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보고 체험한 끝에 얻은 경험적, 직관적인 판단이다.
스탈린과 히틀러 같은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에 입각해 '모든 종류의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구축했던 사회체제를 가리켜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한다.
더 많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 더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억압에서 벗어나게끔, 내면의 천사를 죽이는 것을 도와주기.
그러나 진실과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매머드화한 관료 기구 속에서 자기의 임무와 정부의 정책이 부정이며 불의임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국가이익을 위해 진실을 밝힌 용기는 고민하는 지성인의 최고의 자세인 듯하다.
- 역사의 평가를 받는다.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온 사회가 물신숭배의 광풍에 휩쓸려 들어간 지금, 제대로 사람답게 살려는 의지를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새겨야 할 말이다. 언론 자유가 신문사 사주의 독점적 특권이 되고, 언론사가 사회의 목탁이 아니라 세습적 권력이 되고, 기자가 언론인이 아니라 기업의 직원처럼 행동하는 시대가 되고 보니 이 글이 더 귀하게 다가온다.
인구에 관해서는 아직도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모든 정치 문헌들이 인구를 부양하는 방법의 문제를 완전히 무시한 채 무턱대고 인구 증가를 장려하고 있다. - 멜서스의 인구론 중에서
- 질적인 부분은 무시하고 양적인 부분만 목표로 측정해서 생기는 단순화된 matrix의 문제. 환경 오염 비용은 무시하고, revenue, GDP로만 경제 성장과 수익률을 책정하는 데에서 생기는 기후 변화와 같은 인류 생존이 걸린 문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맬서스의 인구법칙을 이렇게 바꾸어보자.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며 1인당 에너지 사용량과 폐기물 배출량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지구 행성의 온실가스 처리 능력과 생태계 재생 능력은 일정하게 유지되거나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결말은 예정되어 있다. 인구 증가가 지속되고 에너지 사용량과 폐기물 배출량이 계속해서 더 빠르게 증가한다면 조만간 지구 생태계가 붕괴할 것이다. 오존층 파괴,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온난화, 북극 빙하의 소멸과 해수면 상승 등 환경학자들의 예측이 현실화되는 날, 맬서스의 '음울한 예언'은 호모사피엔스의 멸종 또는 '지구 생태계의 위기'로 현실화할지도 모른다.
인구론과 맬서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은지 경계하면서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
- 맬서스 - 피임을 반대, 왜냐면 여성의 품격을 해치므로. 따라서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한 정당한 수단은 여성의 순결이라는 괴상한 결론에 도달함.
맹자는 여러 왕들을 만나 권력의 힘이 아니라 인의로 다스리는 왕도정치를 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맹자의 시도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느 왕도 그의 철학과 이론을 받아들여 실천하려 하지 않았다. 맹자의 사상이 잘못이었던가?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기에 맹자는 나이 70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더 연구하고 제자를 길렀다. 기원전 372년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에 죽었다는 역사 기록이 정확하다면, 맹자는 귀향한 뒤에도 10년 넘게 더 살았다. 2400여 년 전에 83년을 살았으니, 현대인 같았으면 백수를 하고도 남았을 만큼 긴 인생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맹자는 실패한 지식인이다. 살아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죽은 후에도 크게 추앙받지 못했다. 위대한 사상가로 대접받게 되기까지는 150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 12세기 남송 시대에 와서야 유학자들은 맹자를 사서의 하나로 승격시켰으며 성리학의 대가 주자가 주해를 썼다. 맹자는 그제야 비로소 공자의 뒤를 잇는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맹자의 유명한 사단 중 제일 중요한 것이 측은지심이다. 측은지심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함께 느끼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맹자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에게는 이것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사회를 만들어 생활하는 과정에서 협동 정신과 타인에 대한 배려,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 같은 사회적 재능을 진화시켜왔다. 이타 행동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유전적 근친성이다. 이타 행동이라는 재능은 먼저 유전적 근친성이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표출되어 낮은 사람에게로 확장된다.
- Conspicuous act of kindness
흔히들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다른 누군가와 싸우는 전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정체성의 닻을 내린다.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성찰한다.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깊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난다. 맹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나는 측정할 수 없는 사유의 깊이를 느낀다.
"귀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귀함을 지니고 있건만 생각하지 않아서 모를 뿐이다.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진정 귀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하고도 성과를 얻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바르다면 온 천하 사람이 다 내게로 귀의할 것이다."
한고조에 대해서 - 그는 사실 천하의 주인이 아니라 주어진 배역을 각본대로 수행하는 역사의 꼭두각시였는지도 모른다.
- 삶은 자기 개선 노력과 자기 수용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이다. 세상은 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 같지만, 거기에 납득할만한 이야기, 즉 스토리에 힘이 더해져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두 공통의 머리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힘의 강약에 상관없이 설득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경이롭다. 힘에 의해서만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다. 하지만 경험과 성찰, 개선, 그리고 수용이라는 피드백을 통해 사람들 모두가 수긍할 만한 논리와 세상의 이치를, 스스로 인생을 살아보면서 그리고 간접적으로 체득하면서 깨달아가면, 그 길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힘을 모으기도 하면서 함께 변화를 만들거나 변화를 막을 수도 있다. 이게 나에게는 삶을 사는 재미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 질문하고, 답을 얻고, 그 답들을 연결하면서 통용되는 이치를 찾고,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나 같이 이야기 나누는 것. 잘 만들어진, 다른 사람들이 택하는 쉬운 길을 생각 없이 따라가기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질문해서 내 길을 밟아나가기. 오늘 하루도 그렇게 살고 싶다. 꼭두각시처럼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 깨어있는 하루를 살고 싶다.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 사이에는 변이가 있다. 개체의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변이는 보존되고 유전되며 불리한 변이는 소멸된다.
- 다양성, 변이가 중요한 이유. 다름을 인식하려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다윈은 1871년 '인간의 유래'라는 두 번째 대작을 출간했다. 그는 여기서 인간 진화와 관련한 최대 수수께끼를 해명하려고 했다. 이타주의라는 인간의 도덕적 재능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의문이다. 이타주의 또는 자기희생은 같은 종 내부에서 필연적으로 개체 사이의 생존경쟁이 벌어진다는 진화론의 기본 원리와 충돌한다.
인간이 이기적인 동물임을 과소평가하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이타주의와 자기희생이라는 고귀한 도덕적 재능을 진화시켜온 존재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버리지 못하지만, 동시에 이타 행동을 우러러보는 직관적 도덕률을 지닌 동물이다.
타인의 소비는 나의 행복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경제학의 공리다. 베블런은 이것을 부정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의 행복은 내가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 또는 내가 소유한 부의 절대량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많으냐 적으냐에 달렸다.
보수성은 지배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다. 유한계급의 규범과 생활양식은 모든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명예로운 표준으로 통용된다. 하층계급은 유한계급을 타도하기보다 그 일원이 되기를 원하며 그들을 흉내 내려고 애쓴다. 사회와 인간을 이렇게 보면 세상의 소란에 신경 쓰지 않고 이방인으로 살다 가는 쪽이 자연스럽다.
어느 시점엔가 변화한 환경이 기존의 지배적인 생활양식과 습관적 사고를 더는 허용하지 않는 상황이 온다. 사회의 진화는 이럴 때 일어난다. 사회의 진화는 개인이 어쩔 수 없이 변화한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적응 과정이다.
부유층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쉽게 혁신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도록 강제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를 싫어하는 것은 대체로 어떤 변화나 필요한 재조정을 하기가 성기시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오지 원시 부족의 생활상을 관찰하는 인류학자처럼 사회제도의 진화 과정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지켜만 보다가 떠난 베블런이 나를 위로한다. 원래 그런 것이니 상처받지 말라고. 보수성은 유한계급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보편적 성향이라고. 그들은 다만 진보가 요구하는 인습적 사고와 행동 양식의 재조정을 귀찮아해서 그런 것뿐이라고. 생활환경의 변화가 더 진행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회적 혁신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본능적 반발과 비난의 가장 단순한 요소는 사물의 본질적 비속성에 대한 이 관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자가 대변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그 혁신자는 교제하기에는 불쾌한 인물이며 무릇 그와 접촉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혁신은 나쁜 것이다. - 유한계급론 -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똑같이 노출되어 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다르다. 인습적 사고와 행동방식을 바꾸는 데 민감하고 능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둔감하고 소극적인 사람도 있다. 전자는 진보적이고 후자는 보수적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더 유연하게 인습적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교정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일까?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자신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사회제도에 대해 더 넓고 깊게 이해하고 성찰하는 지성적인 사람일수록 더 유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뇌 활동이 활발하고 많이 배우고 다양한 문화를 폭넓게 경험한 사람일수로 더 진보적일 수 있다고 본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평균적 지성과 성찰 능력도 더 높이 발전하며, 제도의 진화 역시 그만큼 빠르고 수월해진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었다.
- 다름에 대한 인식의 기회가 많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본인을 성찰하는 사람.
기술 진보의 경제적 혜택을 토지 소유자가 지대 형식으로 독점하기 때문에 근로대중은 영원히 빈곤을 벗어날 수 없다. 인구가 자꾸 증가하면 토지의 효용이 엄청나게 커지고 토지 소유자의 부도 크게 불어난다. 지주의 불로소득을 조세로 징수하고 그 대신 다른 모든 세금을 철폐하자는 조지의 아이디어는 토지 단일세 운동이라는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진보와 빈곤 중에서
- 내가 밝히려고 했던 그 진리가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다. 그게 쉬울 것 같으면 이미 오래전에 받아들여졌을 것이며, 결코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분투하고 고난을 감수하며 필요하다면 죽기까지 할 진리의 벗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진리의 힘이다.
- 토지 사유는 커다란 맷돌의 아랫돌이다. 물질적 진보는 맷돌의 윗돌이다. 노동 계층은 증가하는 압력을 받으면서 둘 사이에 갈리고 있다.
조지가 밝히려고 했던 진리는 분명하게 밝혀졌다. 그는 옳았으며 지금도 옳다. 그러나 그가 말한 대로 그 진리기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사람은 보통 진리보다는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변화는 아름다운 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이르지 못하는 부분적, 점진적인 개선을 아름답지 않거나 의미 없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누구도 변화를 일으키려고 도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조지의 진리는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진화하여 일반적으로 이익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상태에 이르기 전에는,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남을 것이다. 다시 헨리 조지를 읽으면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래, 진리가 아름다운 것은 그걸 실현하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지도 몰라. 행하기 쉬운 진리에는 매력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근본적 변화'가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 자체가 멋지기도 하지만,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서려는 '진리의 벗'들, 그들의 몸부림이 아름다워서일지 몰라.
국가기관과 언론기관이 한통속이 되어 저지르는 불법행위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폭력이 무지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무지란 처지를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는 능력의 전적인 결여를 의미한다.
만약 슈프링어 재벌이 '빌트'와 같은 신문뿐만 아니라 방송사도 가지게 되었다고,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차이퉁'의 보도 행태를 계속한다고 가정해보라. 무슨 일이 더 벌어질 것인가.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 큰 차이퉁이 세 개 있고, 작은 차이퉁이 또 여럿 있는 나라에 차이퉁 방송까지 등장했다. 신문사와 대기업이 지상파와 종합편성 채널 편성권을 장악하고, 대기업이 광고주의 위력으로 다른 미디어까지 간접적으로 조종하면서 인터넷 포털까지 좌지우지한다. 그들은 자기네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자기네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가공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형식으로 국민에게 제공한다.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 진실이라고 여기는 시민들은 남의 머리가 생각한 것을 내 머리로 생각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카타리나 블룸이 묻는다. '그대는 신문 헤드라인을 진실이라고 믿습니까?' 나는 대답한다. '아니오, 믿지 않습니다. 헤드라인을 진실로 믿어도 되는, 그런 좋은 신물을 구독해보는 것이 내 간절한,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소망입니다.'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관한 기록이다.
자유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최고의 가치이기도 하다. 나는 이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저마다 원하는 삶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게 믿는다.
관습을 따르지 않을 자유를 최대한 인정하자. 현재의 관습에 어긋나는 행위 가운데 어떤 것은 새로운 관습이 될 수 있다. 더 나은 행위 방식을 찾을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이유만으로 관습을 무시하는 독자적 행동을 장려하자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우월한 사람만 자기 방식대로 살 권리가 있다는 것 또한 아니다. 만안이 단 한 사람이나 소수의 방식에 따라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스스로 설계한 삶은 그 자체로 가장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방식이기 때문에 가장 적합하다. 인간은 양이 아니다. 양도 완전히 다 똑같지는 않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떤 사람의 행동 자유에 개입하는 것은 자기 보호가 목적일 때만 정당하다.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국적과 고향과 부모 형제를 선택한 이도 없다. 우리는 온갖 것을 '운명'으로 받아 안고 세상에 나온다. 주어진 사명 같은 건 없다. 정해진 의미도 없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세상에 살러 왔다.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길이다. 남의 눈치를 살피면서 남의 방식을 따라 살 필요는 없다.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사회가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은 타인과 관련된 행동뿐이다. 오직 본인 자신만 관련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그 사람의 몫이다. 자기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한 주권은 각자의 것이다. 더 많은 이익, 더 많은 행복, 남들이 볼 때 옳은 일은, 충고하거나 설득하거나 권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엇인가 강제하거나 불이익을 줄 합당한 이유는 아니다.
-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누가 충고/설득/권유 - 특히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이 나에게 그럴때는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도 충고/설득/권유를 할 자유가 있으니, 그들을 바꾸려 하지 말자.
사람이 독서와 학습을 통해 사회적 환경과 경험의 제약을 넘어 보편적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인간은 누구나 오류를 범한다. 어떤 시점에서 어떤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진리라고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려면 다른 의견을 가질 자유를 인정하고 다른 의견을 표현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우리의 뇌는 쾌락과 고통의 크기를 계산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에서 패턴으로 정보를 처리한다. 인간은 속기 쉬운 동물이다. 언제나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행위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다. 그토록 강조했던 '개별성'을 실천했다.
- 나도 '밀' 처럼, 유일무이함을 귀하게 여기면서 살다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