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모든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겠다! 연애에 관한 내용을 다룰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애, 인류애, 형재애, 모성애, 성애 모두를 다루며, 사랑보다는 이를 실천하기 위한 "기술"에 더 방점이 찍혀있는 책이다.
책을 읽으며 가장 큰 생각의 전환을 경험한 부분은, 사랑을 위해 "신앙/용기"가 필요하며, 이는 훈련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작가는 책에서, 사랑은 내 행위 속의 판단과 결단을 포함하고 있으며, 대상에 대한 신앙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여기서 신앙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나의 신념, 결단, 확신을 아루는 말로 신앙을 사용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일상 생활에서 신앙을 단련하며 훈련해야한다고 말한다. 이야말고, 로봇/AI와 인간의 극명한 차이점이지 않을까?
사랑 <- 판단/결단 <- 용기/신앙 <- 훈련 <- 명상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 용기가 필요하며, 사랑은 태도의 문제이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물론 적절한 때와 시간에 적절한 사람이 나타나야하는 운/타이밍도 너무 필요하지만, 그런 타이밍이 맞아떨어져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태도/용기/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 사랑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신앙과 용기의 훈련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첫 단계는 어디서 언제 신앙을 상실하는가에 주목하고, 신앙의 상실을 은폐하는 데 이용되는 합리화를 간파하고, 어디에서 우리가 비겁한 태도로 행동하는가, 또한 어떻게 비겁한 행동을 합리화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배반하는 경우 언제나 약해지며, 우리가 약해지면 점점 더 새로운 배반을 하게 되고,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결국 사랑에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으며 떠오른 사랑과 관련된 생각들이다.
-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존중의 마음을 가지고 설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 발표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즉 발표를 못한 나도 충분히 사랑스러워, 괜찮아 하는 자기애를 먼저 가져야 한다.
- 사람들은 다들 저마다의 전쟁을 하고 있다. 연민의 마음을 가지자.
- 사랑의 마음은 남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사랑이 가득 차서, 타인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그 행위 자체에 만족감과 의미가 있다.
-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야말로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해주는 것 같다.
-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상대방이 그들 자신의 흐름대로 흘러가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다. 흐름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고, 자신의 흐름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기.
- 남편과의 사랑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로 같은 궤도를 그리면서 움직이는, 두 행성의 만남 같다. 서로의 감정을 때로는 다독이면서, 때로는 누르면서 날카로운 면을 부드럽게 해줘 우리 둘 다 좀 더 완만하고, 더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사랑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감정일 뿐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감정은 생겼다 사라져버릴 수 있다. 내 행위 속에 판단과 결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내가 이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 실제로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나, 남편이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를 생각해보면 - "너의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해" - 와 같은, 결단과 주문에 가까운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잦다.ㅋㅋ I really love you, that's why I'm even doing this for you.
사랑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그것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곳이다. 거기에 조화, 갈등, 기쁨, 슬픔 중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에센스 차원에서 경험하는 것이요, 각자가 자신들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합일되는 것이다. 사랑의 현존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증거가 있을 뿐이다. 곧 관계의 깊이, 관련된 각자의 생기와 힘이 그것이다. 이것은 사랑을 인식하게 하는 열매이다.
인간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기계에 대해 좋은 것은 인간에 대해서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논리는 이렇게 계속된다. 현대인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는 무엇인가를, 곧 시간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서 얻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지 못한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 말고는.
- 촌철살인
무조건적 사랑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 가운데 하나다. 한편 어떤 장점 때문에, 다시 말하면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경우, 언제나 의심이 남는다.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바로 이 순간 하고 있는 활동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하고 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 만일 정신 집중이 되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일이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우리의 충분한 주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현실성을 갖게 된다.
형제애는 우리 모두 하나라는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재능, 지능, 지식의 차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인간적 핵심의 동일성과 비교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러한 동일성을 경험하려면 주변에서 핵심으로 침투할 필요가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주로 표면적으로 지각한다면 나는 주로 차이점을 지각하게 되고, 이 차이점은 우리를 분리한다. 내가 핵심으로 파고들면, 나는 우리의 동일성, 곧 우리는 형제라는 사실을 지각하게 된다. 중심과 중심의 이러한 관계는 주변과 주변의 관계와는 달라서, '중심적 관계'이다.
- 인터뷰 할 때 느껴짐. 표면만 물어보는 대화를 하면, 좋은 인터뷰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핵심을 파고드는 대화를 나누면 좋은 인터뷰라고 느껴진다.
사람은 자신의 노동의 대상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일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자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신의 생명, 행복, 성장, 자유에 대한 긍정은 우리 자신의 사랑의 능력, 곧 보호, 존경, 책임, 지식에 근원이 있다. 만일 어떤 개인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오직 다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집단과의 합일은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아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 목적이 군중에 소속되어 있는 합일이다.
모든 형태의 창조적 작업에서 일하는 자와 그 대상은 하나가 되고 인간은 창조 과정에서 세계와 결합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깊은 불안감과 고독감에 쫓겨 끊임없이 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야망이나 돈에 대한 탐욕에 쫓겨 끊임없이 이정의 노예이고, 그들은 쫓기고 있으므로 사실 그들의 활동은 '수동적'이다. 곧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라 수난자이다. 한편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세계의 일체성을 경험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도 없이 조용히 앉아서 명상을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수동적'이라고 생각된다. 사실은 정신을 집중하는 이러한 명상적 태도는 최고의 활동이며, 내면적 자유와 독립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영혼의 활동이다.
우리의 동료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수수께끼인 것처럼,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언제나 수수께끼이다.
대부분의 어머니가 '젖'을 줄 수 있으나 '꿀'까지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린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무리 심하게 말해도 과장이 될 수 없다. 삶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불안도 감염된다. 이 두 태도는 어린아이의 성격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실제로 어린아이, 그리고 어른 사이에서 '젖'만 먹은 자와 '젖'과 '꿀'을 먹은 자를 가려낼 수 있다.
자아도취적이고 지배욕과 소유욕이 있는 여자는 어린아이가 연약할 때만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성공할 수 있다. 오직 참으로 사랑할 줄 아는 여자, 받기보다 주는 데서 더 많은 행복을 느끼는 여자, 그녀 자신의 실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여자만이 어린아이가 분리 과정을 밟고 있을 때도 사랑하는 어머니일 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의 기본적 태도의 불변성, 그의 퍼스낼리티 핵심의 불변성, 그가 가진 사랑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나는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의견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본적 동기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 존중은 자신의 일부로서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다.
어린아이의 생활에 대해 중요한 인물이 이러한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교육과 조작이 갈라진다.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도와준다.
로봇에게는 신앙이 필요하지 않다. 로봇에게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신앙과 권력은 상호 배척한다.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생활의 일차적 조건으로서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격리와 소유를 자신의 안전책으로 삼는 방어 기구에 칩거하는 자는 누구든 자기 자신을 죄수로 만들게 된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용기, 곧 어떤 가치를 궁극적 관심으로 판단하는-그리고 이러한 가치로 도약하고 이러한 가치에 모든 것을 거는-용기가 필요하다.
여론이나 예측하지 못한 몇 가지 사실이 자신의 판단을 무효화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는 것, 자신의 확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자신의 확신을 고수하는 것, 이러한 모든 일에는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곤란과 좌절과 슬픔을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 될 부당한 처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극복해야 할 도전으로 받아들이려면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신앙과 용기의 훈련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첫 단계는 어디서 언제 신앙을 상실하는가에 주목하고, 신앙의 상실을 은폐하는 데 이용되는 합리화를 간파하고, 어디에서 우리가 비겁한 태도로 행동하는가, 또한 어떻게 비겁한 행동을 합리화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배반하는 경우 언제나 약해지며, 우리가 약해지면 점점 더 새로운 배반을 하게 되고,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회는,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랑할 줄 아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와 분리되지 않고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 이런 사회면 좋겠다.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고, 사랑할 줄 아는 본성을 지키게 하는 사회.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존재의 궁극적이고 현실적인 욕구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구가 은폐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랑의 본성을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러한 결여 상태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이다. 개인의 예외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 신앙이다.
-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런 결여 상태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
그는 정신분석학자로서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미국 땅에서 그렇게 했다. 그는 외교 정책, 소련과의 냉전, 핵군비 증강 문제를 분석하는 글을 쓰고, 상원의원들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관여하고,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벌이고, 긴장 완화 정책의 대변자가 되었다.
- 멋지다! 사랑을 세속적인 현실 세계에서 실천하는 에리히 프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