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박선후의 10대: 가장 찬란한 그리고 가장 잔인한 (2)
소설 박선후
이 이야기는 진짜입니다. 박선후씨는 실제 인물이에요.
아뇨. 그냥 소설입니다. 박선후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5. 박선후의 10대: 가장 찬란한 그리고 가장 잔인한 (2)
선후의 첫사랑.
세희는 예뻤다.
키도 크고 얼굴도 예뻐 연예인을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도 그녀에게 한 눈에 반했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서슴없이 이야기한 덕에 둘은 연인이 되었다.
함께 있기만 해도 설렜다.
흔한 이야기지만, 정말로 심장이 콩닥대는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혼자서 부끄러워한 적도 있었다.
데이트를 하다 옷을 사고는 갈아입을 곳이 없어 비디오방에 간 일이 있었다.
뒤로 돌아 있으라고 한 후 새 옷으로 갈아입은 세희가 ‘이제 돌아봐도 돼’ 하는 말에,
시선을 돌렸을 때는 새 옷을 입은 그녀가 천사로 보이기도 했다.
사랑스럽고 소중해서 온종일 간질거렸고,
닳을까 날아갈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마구 들기도 했다.
세희는 그의 여자친구였고, 태영은 그가 아끼는 친구였으므로 셋은 종종 모였다.
재수생이던 때의 어느 날, 셋은 모여 태영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즐거운 자리가 이어졌고 젊은 청춘들 답게 취하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장소 또한 태영의 집이었으므로 어떠한 위협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는 취해 잠들었다.
그가 경계 없이 잠들어버린 그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한 달이 지나갔다.
한 달 동안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으나, 심각하게 몰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이후 셋이 모일 자리가 여러 번 있었으나 세희는 에둘러 자리를 거절했다.
한 달이 지나서야 세희가 할 말이 있다 저녁을 먹자고 했고,
그제서야 그날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잠든 그 밤, 태영은 세희를 강제로 끌어당겼고 술로 가득 찬 몸으로 그녀를 짓눌렀다.
감히 상상 조차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는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 속에서 나온 말들이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만 공중으로 흩어졌다.
겨우겨우 단어들을 잡아 채 제자리로 나열해 봐도 도무지 읽히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얘기를 듣고 세희를 돌려보낸 후 그는 밤새 술을 마셨다.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고,
잠들어 있었던 자신의 모습과 그 옆에서 이뤄지던 그 일들이
머릿속 상상에서 사실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은,
세희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하게도 했지만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런 의심을 한 스스로가 증오스러워졌다.
날이 밝았고 결심이 섰다. 그는 뒷주머니에 칼을 넣었다.
신문에 싸 구겨넣은 칼로 무엇을 해야할지를 되뇌었다.
태영에게 물어보고 그게 정말로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그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고 태영의 집 앞에 도착했다.
사실이냐 묻자 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끝에 무릎을 꿇었다.
태영의 무릎이 땅에 닿는 순간,
선후가 서 있는 땅이 쩍 하고 갈라졌고 그의 세상이 무너졌다.
무너진 세상에서 그를 둘러싸던 분노와 신문지에 싸인 칼은 그대로 힘을 잃었다.
칼을 태영의 옆으로 던지며, 그냥 죽어버리라 소리 지르곤 발길을 돌렸다.
그 뒤 한 달을 꼬박 술만 먹었다.
삼킬 수 없는 것을 삼켜내느라 엉망이 된 시간이었다.
그렇게 자리잡은 죄의식이,
사랑과 불안으로 얽혀있던 한 덩어리에 덕지덕지 자리 잡았다.
세희가 한 톨의 상처도 더 받게 해선 안 됐으므로,
그녀를 이전과 똑같이 대하려고,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려주려고
계속해서 스스로의 행동과 생각을 검열하며 지냈다.
세희와 그는,
겉으로 보기엔 부서지지 않았으나
이미 금이 가버린 유리병이었다.
아주 예민하게 신경 써서 잡지 않으면 쉽게 손을 베였고,
그 병에는 어떤 것도 담을 수가 없었다.
세희의 영혼은 겁에 질려 자기기만을 택했고,
선후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둘 사이가 멀어지지 않도록
죄의식과 불안으로 두 사람을 칭칭 감았다.
둘은 이후 5년의 시간을 함께 하지만,
그녀는 그 시간 내내 수십번 섣부른 헤어짐을 고하고 사라졌고,
그는 일방적인 이별 통보 마다 맥없이 망가지곤 했다.
그 시간 동안 그의 마음 속 어딘가에선 세희가 그를 함부로 대해주기를,
그러니까 자기에게 그 일에 대해 벌해주기를 바랬으므로,
그녀의 무신경한 이별통보가 이따금씩은 면죄부로 느껴지는 날들도 있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불안과 죄의식과 연민 같은 것들로
그를 꽁꽁 싸매 그녀 옆에 있게 했다.
어느 날 선후는, '드디어 세희와 그가 이 짓눌린 굴레를 벗어나는구나.' 하며 희망을 보게 된다.
세희가 서울에 놀러 왔고, 일주일을 함께 보냈는데, 그게 함께 한 첫 여행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그런 류의 데이트를 한 적도,
관계에 대한 진전을 이야기할 수 도 없었으므로 실로 큰 일이었다.
세희는 그의 형을 만나 인사했고, 그는 친구들에게 정식으로 그녀를 소개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가 그에게 밤을 허락하기도 했으므로,
그는 드디어 둘 사이를 옭아매던 죄의식과 불안의 끈들이 느슨하게 풀려간다 생각했다.
드디어 그를 믿고 스스로를 내어주는 세희를 보고 그는 뜨거운 무엇인가를 느꼈다.
아마도 사랑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기대 또는 희망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그의 바램과 달리, 관계의 항상성에 따라 그들은 원래의 궤도로 빠르게 돌아왔다.
이별을 통보 받고, 그러지 말라 애원하고, 소식없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그런 일들.
그러던 와중 IMF가 왔고 그는 군대에 갔다.
훈련소까지 이어지던 지진하던 관계가 자대배치를 끝으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이별이라고 생각했다.
휴가 때는 고향에 가지 않고 서울에서 대학 동기들을 만나 놀고선
그대로 복귀하는 날들이 잦아졌다.
휴가에서 돌아오면 함께 놀던 친구들이 편지를 써주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현정의 편지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현정은 대학 동기 중 한 명이었는데,
그가 일방적인 시련에 술에 절어 살았던 시절을 다 보아온 존재였다.
그리고 세희가 서울에 왔을 때, 그녀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던 자리에 앉아있기도 했다.
그 시절 그에게는 어떠한 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는데,
현정은 몹시도 확실한 사람이었다.
제대 후의 삶에는 확실한 것이 필요했다.
제대 후 학교를 다니던 그에게
그간 연락이 끊겼던 세희가 취업을 위해 서울로 왔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 때까지 그녀는 그의 생에 유일한 사랑이었으므로
그는 배알 없이 또 설렜고 기대했다.
몇 번의 만남이 있었고 그는 그들의 앞날에 대해 알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날에 뭘 하냐 묻는 질문에 세희는 선약이 있다 답했고,
그 대답으로 그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구나, 체념했다.
현정은 체념한 그에게 왔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녀는 그를 불러냈고, 작은 선물을 건넸고,
연인이 되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그런 말을 건넨 현정의 표정엔 수줍었지만 분명한 결의가 느껴졌는데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은 그 결의가 그를 확 끌어당겼다.
그녀는 예상과 같이 살뜰하고 확실했다.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그의 집에 날마다 와선 밥을 해주고 청소를 했다.
불안과 방치가 익숙했던 그에게 야무진 잔소리를 했고,
그것들이 그를 안정시켜 주었다.
그에게 사랑은 언제나 불안과 함께 하나의 실타래로 엮여있었는데
현정은 그렇게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서슴없이 잘라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안정과 확신 속에서 4년의 연애를 끝내고
선후는 현정과 결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