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을 맞아)
광복 80주년을 며칠 앞두고, 나는 아주 오래된 시대로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내 꿈의 주인공은 최재만,
계절은 일제 강점기의 말로를 상징하는 겨울.
그의 고향은 만주로 추정되는, 포탄 공장 근방에서였다.
그곳에서 나는 재만이 남긴 혼잣말을 들으며, 눈송이가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이면서, 내가 아니었던 재만.
그의 비통한 심장으로 쓴 편지는, 하늘에서 기도문처럼 흘러왔다.
엄니. 나, 재만이요.
나는 형민이와 도윤이와 함께 이 마을을 떠나요.
엄니, 나는—
우리 태린이, 태진이, 태만이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소.
일본놈들에게 공출당하듯 끌려가
공장에서 무기를 만들고,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한 채 혹사당하다
개처럼 맞아 죽는 현실이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소.
친척이든 남의 자식이든,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소.
또래 일본 아이들은 뛰어놀고 있는데,
우리는 무기 공장에서 쇳가루를 마시며
잠깐 숨 고른 대가로 채찍질을 당하오.
그날의 피 냄새와 쇠내를,
나는 잊을 수 없소.
순사들의 총구가 엄니와 아부지를 향할까
무서워서, 나는 맞서지도 못했소.
형민이와 도윤이는 이를 갈며
놈들을 죽이자 했지만,
나는 그 말마저 막았소.
그런데 엄니.
나는 이제 죽으러 가려 하오.
재민 형님도 없고,
참아야 할 이유도 없소.
주재소에 갔다가 반병신이 된 형민 아부지,
무기 공장에서 폐병에 걸려
오늘내일하던 재민 형님,
모두 떠나보내고 나니
눈에 뵈는 것이 없소.
독립군이 근처에 있다 하니
나도 그 길을 가려 하오.
나라가 일본놈들의 군홧발에 짓밟히지 않도록.
그러니 내가 뼛가루가 되어 돌아와도 슬퍼 마시오.
내 몫을 다해 싸우다 간 것이라 생각해 주세요.
재만아.
네가 떠나 뼛가루로 돌아온 뒤,
네가 지키려 했던 태린이, 태만이, 태진이
모두 끌려갔다.
일본놈들이 발악을 하니 어쩌겠니.
아이들 모두 공출처럼 사라지고
생사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엄니도, 성치 않은 아부지도 총을 들었다.
나라의 미래는 아이들이니,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이야 아깝지 않다.
우리는 폐가 지붕에 숨어 산다.
일본놈들에게 쫓기던 성훈이와 사랑이,
그리고 나와 태수만 남았다.
어제는 일본놈 하나가
우리 집 촛불을 보고 들이닥쳤지만,
내가 총을 쏘아 쫓아냈다.
골목에는 화약 냄새가 퍼지고, 달빛에 날린 먼지가 목에 걸렸다.
네 아부지는 내일,
일본놈들 포탄 만드는 공장에 가
불을 지를 계획이다.
나는 그 옆에서 마지막까지 함께하겠다.
나는 고향집 지붕 위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
엄니가 뛰어난 사격 솜씨로 놈들을 쓰러뜨리는 장면,
태진이가 울부짖으며 포탄을 안고 불 속으로 사라진 순간,
그 어린 목숨이 꺼지는 걸 보며 가슴을 쳤다.
아부지는 불길 속에서 포탄을 폭발시키며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웃었다.
내가 본 마지막 웃음이었다.
포연 사이로 엄니의 눈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또렷했다.
그 눈빛은 두려움이 아닌, 마지막을 준비한 사람의 빛이었다.
언젠가 이 땅에는
다시는 아이들에게 채찍이 내려앉지 않는 날이 오리라.
그날, 우리는 모두 별이 되어 아이들 머리 위를 지켜보겠지.
우리가 지킨 나라는— 그런 행복한 나라가 되어 있기를.
마지막 엄니의 바람이, 기도문처럼 귓가에 울렸던 것이 꿈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새벽 컴퓨터 앞에 앉았다. 광복 80주년의 첫 시간이었다.
꿈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 현장을 기록할 수는 있었다.
나문희 선생님을 닮은 엄니의 눈빛,
불 속에서 웃던 이순재 선생님을 닮은 아부지,
송강호 씨를 닮은 재만의 피 울음까지—
그 모든 얼굴을 마음속에서 어루만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나라에서
그들이 바라던 독립 80년의 오늘만큼은,
호국영령을 기리며 살아보겠다고.
광복 80주년의 오늘, 나는 꿈속 재만과 엄니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로 했다.
태극기를 달 수는 없지만,
아이와 함께 태극기를 그린 뒤 창문에 붙이고
3분간 묵념을 하고, 독립군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해주려 한다.
그게, 평범한 사람에서 독립군으로 변했던, 꿈속 재만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