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의 의미, 나의 동기들

(feat. 오늘 우리 만난 지 5992일이야!)

by Rachel

날짜를 세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라 기억하기가 쉬운 것 같다.

나는, 동기들을 처음 본 날짜를 기억하고 있고,

그 날이 양력 아빠의 생일이라 더 잘 기억하기도 한다.



3월 22일, 우리는 처음 만난 술자리에서 통성명을 했다.

그리고 4월 첫 주, 맞기수 엠티를 갔다.

나는 엠티에 관해서 몰랐기 때문에

엠티가 뭐의 약자인지도 모르고 가는 버스 안에서 동기들에게 물어보기 바빴다.


엠티의 엠티가 Membership Training의 약자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맞기수 선배인 라미 언니와 그 친구인 영이 언니, 이정 선배 셋이서 답사를 갔다 왔었던 곳.

우리는 사람이 거의 없는 해수욕장을 골라 갔는데,

거기의 민박집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준 것이 기억난다.

고기 파티를 할 때는 꼭 문을 열고 할 것, 그리고 발은 꼭 바깥에서 씻고 오라는 것-

모래가 하도 많은 곳이라 그런지 깨끗하게 청소해도 모래가 계속 나온다는 너스레를 떠는 사장님을 보며

우리는 킬킬 웃으며 각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마트에서 필요한 것을 사서 나오는 길, 하늘이 어두웠다.

비가 오는 건가, 걱정을 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다른 동아리에서도 사람들이 온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은 벌써 삼삼오오 모여서 옷을 말리는 것을 보고

'와, 바다에 벌써 들어갔다 나와?' 라고 생각했다.


다른 민박집 손님들은 벌써 소리를 지르고 해수욕을 즐기는 것을 봤는데,

날씨가 흐려지는 것을 보고 다들 걱정이 앞섰다.


"진짜 괜찮을까?"

"초봄이라 약간 춥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그래도 노는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그럼 배고프니까 점심 먹고 가자. 라면 끓일 사람?"

이정 선배와 라미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식품영양학과였던 밍밍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저 라면 잘 끓여요!"

나는 밍밍이를 보면서 '역시 식품영양학과다'는 생각을 하며 부엌에 서 있었다.

그러자, 기수장이었던 용용이가 말했다.

"너도 도와. 멍 때리지 말고."

"어, 알았어."

뭘 돕지, 하면서 서 있으니, 산적이 말했다.

"야, 너 비켜. 걸리적거려."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내가 걸리적거린다는 소리에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조용히 이정 선배의 가까이에 누워서, 사진을 찍는 영이 언니를 바라봤다.

언니는 내 눈에 눈물이 맻힌 것 같다며 제로 게임을 제안했고,

나는 사진 찍던 언니를 보면서 서운함에 눈물 짓던것도 잊고 까르륵 웃고 말았다.



밍밍이와 라미 언니의 지시로 총 12인분의 라면이 끓여졌다. 냄비도 꽤 컸고,

각자 라면을 담느라 분주한 사이, 날씨가 맑아져 빛이 나는 하늘을 보았다.

"오! 빛 나요! 하늘에 지금, 맑아졌어요!"

내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며 나는 설렘을 안고 바깥을 봤다.

먹던 라면은 그대로 둔 채였다.

그러자 산적이 말했다.

"야, 먹던 건 치우고 가. 니가 공주냐."

"아, 잠시만 보고 먹으려고 했어."


왜 나한테만 그렇게 말하는 걸까.

나는 뭘 잘못했나, 순간 숨이 막혔다.


서운한 마음을 감추며 라면을 먹으려 앉았다.

그 말을 들은 뒤라서였을까? 정말 맛있던 라면은 맛이 없어졌다.

좀전까지도 맛있고 따끈한 국물이었는데, 한김 식어버린 느낌.

마음과 같은 온도로 느껴지는 라면에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설거지 거리 통에 넣고 우울한 마음으로 그릇을 내려다 보았다.

설거지가 끝난 뒤, 다들 배도 채웠겠다 이제 나가자며 이정 선배가 시동을 걸었다.


다들 와아~ 소리 지르면서 모래밭으로 뛰었다.

금을 하나 그어놓고 편을 갈라서 씨름도 하고,

씨름 토너먼트도 하고 있었는데-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하다 보니 산적과 내가 씨름에서 붙게 되었다.

나는 서운한 마음을 한껏 표현하리라 생각하면서 덤볐는데,

이럴수가. 산적은 단숨에 내 다리 한 짝을 번쩍 들어 올렸다.

허망하게 모래 위에 내동댕이쳐진 순간, 내 서운함도 우스꽝스럽게 흩어져 버렸다.


진 사람들의 토너먼트에서 나는 우리 동기들 중 가장 키가 큰 J를 내동댕이 쳤다.

"와! 이겼다!"

주먹까지 불끈 쥐고 이겼다며 폴짝폴짝 뛰는데, 옆에서 세 선배가 말했다.

"헐. 쟤를 이기네?"

"야, D랑 J가 체구 차가 두배가 넘는데. 대단하다."

이정 선배와 영이 언니, 라미 언니는 거의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씨름에서 이긴 기세로 신이 나서, 다 같이 환호성을 지르며 바닷가로 달려갔다.

파도는 아직 차가웠지만,

누군가 먼저 이정 선배를 메쳐 업고 바다로 풍덩 뛰어들자 비명과 웃음소리가 뒤섞이며

우리도 하나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으앗 차가워!"

"야, 잠깐만 나만 이런 거 억울하다. 지금 밍밍이 다들 잡아라."

"네? 밍밍이는 아니죠! 감기 걸렸댔어요!"

밍밍이를 챙기는 산적의 목소리에, 나는 그를 슬쩍 째려보았다.

다른 애들한테는 다정하면서, 왜 나한테만 저럴까.

“아, 그래? 그러면 J 잡아라! 잡으면 고기 한 점 더 준다!”


순간 파도 소리 위로 웃음과 비명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J는 끝까지 버텼지만, 남자 동기들이 줄줄이 풍덩—
결국 이정 선배, 용용이, 진진이, 선동이까지 차례로 빠지며
모래사장은 순식간에 대참사가 됐다.




학과도, 고향도, 나온 고등학교도 모두 다른 우리들은

그날 모래사장에서 뒹군 뒤에 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저녁, 고기파티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둘러앉아 폭탄주를 제조했다.

장난을 좋아하는 이정 선배는 폭탄주에 양말을 넣어 이리저리 젓었다.

그리고 밍밍이와 산적은 멸치액젓을 술에 살짝 넣었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고춧가루 한 꼬집을 넣었다.

누가 먹을건지 알기 때문이었다.


"자, 1월! 3월! 4월 생일자들— 앞으로!"하는 라미 선배의 말에 산적과 밍밍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니, 우리보고 넣으라고 했는데."

"괜찮아, 5월 6월 7월 생일자들 꺼는 너네가 제조할 거야."

"그럼 마실게요!"

신나게 마셔대는 J를 보면서, '저 녀석 진짜 91년생 맞나?' 싶었다.

마시는 J를 보며, 밍밍이를 챙기던 산적은 남은 폭탄주를 다 마셨다.

그러고도 안색 하나 안 변하는 산적을 보며 속으로 놀랐다.

'와, 저렇게 잘 마시는 애였어?'

하긴, 그러니까 애들을 다 챙겼겠지.


다음, 5,6,7월 생일자에는 나와 용용이, 진진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어, 잠깐만요. 양말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방금 그거 뭐예요?"

"응? 식초."

활짝 웃는 영이 언니를 보며 우리는 잔을 들고 서로 눈만 굴리며 얼마나 마실 건지 가늠했다.

"음. 내가 먼저 마셔도 되지?"

나름 벌컥벌컥 열심히 마셨는데 하나도 안 줄었다. 속으로 한숨을 폭 쉬며 잔을 용용이에게 넘겼다.

술을 잘 못하는 용용이라,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웬일인지.

용용이는 내가 남긴 술을 반 이상 마셨고, 한모금쯤 남았을 때 이정 선배가 술을 리필했다.

"아, 아니! 리필이 어디 있어요!"

진진이가 불평을 하자, 리필하던 영이 언니가 말했다.

"진진이 너 술 잘 마시던데- 더 먹어 ^^"

그리고 리필된 술을 원샷 못한 진진이는- 벌칙으로 술을 더 사러 가야 했다.

나도 얼굴이 달아올라서, 진진이와 술을 사러 밖으로 나갔다.


"진진아."
"응?"
"나, 오늘 느낀 건데… 산적이 나한테만 유독 까칠한 것 같아."

"…그걸 이제 알았어?"

다정하게 묻는 진진이의 말에 눈물이 찔끔 났다.
"나, 뭐 잘못한 거 있을까? 내가 모르는 잘못이라도 했을까? 같은 학과라서 나는 반가운데… 항상 나만 찍어서 그러잖아."

"그건 네가 눈치 없어서 그런 걸걸. 남자기수끼리 술 마실 때도 그러더라. 어리버리해서 싫대."

"…대가리 꽃밭 얘기도 했겠네."

그 말을 듣던 진진이가 잠시 멈춰 서더니, 아이스크림을 따서 건네며 말했다.
"너한테 그 얘기 직접 했어?"

"응. 그래서 좀… 상처 받았지."

"대가리 꽃밭 얘기를 너한테 직접 할 줄은 몰랐네. 산적, 성격 꽤 세구나."

"뭐, 그러거나 말거나지. 나는 그래도 계속 말 걸거야. 대가리 꽃밭의 위력 좀 보라지."

진진이가 준 아이스크림에 집중하는데, 진진이가 대답했다.

"나는-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어?"

갑자기 뭔 소리야. 취했나.

"너 취했냐."

"아니, 나 S가 좋아. 그래서 너한테 얘기하는 거야. 여자애들한테 두루두루 친한 건 너잖아."

"어- 그렇지. 기숙사생들 6명이랑 다 친한건 나니까."

"그러니까, 말좀 잘해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진진이가 무거운 술은 들고 간다며 가버린 동안,

나는 바닷가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검은 바다를 보았다.


검은 바다-

넓고 고요한 바다에, 달조차 없는 어둠.

꼭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내 마음의 우울상자를 열려는 순간이었다.

"D야!"

누군가가 부르길래 그쪽으로 뛰었다.

"응? 뭐야?"

"우리 집합이래."

"뭐, 무슨 집합?"

"몰라, 모래사장에 나가래. 가자."

S가 부르길래 나도 그쪽으로 갔다.

세상에나, 남자애들이 모두 술에 취해서 몸을 못 가누는 걸 봤다.

비틀비틀하면서 헛소리를 하는 진진이나, 얼굴이 벌개진 용용이나,

얼굴이 그대로지만 눈이 계속 감기는 산적이나-

남자들은 모두, 술에 잠겨서 자는 듯했는데 갑자기 집합이라니.

뭐 잘못했나?



이정 선배가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21기들. 너네 동기 맞지?"

"네!"

"대답이 왜 달라. 동기 맞나?"

"네 맞습니다!"

"그러면 저기 폴대까지 동기 챙겨서 잘 갔다와."

"왜요?"

술에 취한 진진이가 혀가 풀려 묻자마자 이정 선배가 말했다.

"뭐긴! 우리 검도회 전통이지! 당장 갔다와! 반항하면 세바퀴야!"

"네!"

다들 대답하고 허겁지겁 뛰는데, 아까 폭탄주 마신 세 사람이 말썽이었다.

용용이는 정신을 차리고는 있는데 계속 구역질을 했고,

헛소리를 하는 진진이는 그렇다 쳐도,

자꾸 폴대한테 반말하는 J는 덩치가 커서 꽤 힘든 편이었다.

결국 셋씩 조를 짜서, 용용이와 진진이, J를 전담마크했다.


헥헥거리며 폴대를 찍고 오니, 목검이 각 자리에 있었다.

"이건 뭐지?"

"각자 목검 잡고! 빠른머리 100회 친다 알겠나?"

"네!"

"구령 틀리면 1000번이야!"

"네!"

그리고 빠른머리 100회를 치기 시작했다.

술을 먹고, 체력을 뺀 뒤에 빠른머리를 치기 때문일까? 나도 곧 어질어질해서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찌저찌 100회를 치고 나자, 손바닥이 얼얼했다.

숨은 목까지 차올라 헐떡거렸고, 술기운은 이미 땀으로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그때 라미 언니가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중단 자세로 10분! 동기들이 쓰러지면 챙겨서 끝까지 버텨. 알았어?”

“네!”

목검을 움켜쥔 손에 힘이 다시 들어갔다. 그런데 다리에선 힘이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술로 흐트러진 몸과, 훈련으로 가누기 힘든 자세.
10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동기애와 근성을 시험하는 끝없는 시련처럼 다가왔다.


10년 같은 10분이 지나고 나니, 드디어 모래사장에서의 과업이 끝났다.

모두 지쳐 모래사장에 앉았다.

다리까지 쫙 벌리고 앉아 있으니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 내가 먼저 소리쳤다.

"21기, 사랑한다!"

그러니까 저쪽에서 산적이 말했다.

"나도 누구 빼고 사랑해!"

"뭘 빼긴 빼냐. 그냥 다 사랑해 하면 되지."

용용이가 산적에게 툭 던진 말에, 나도 볼멘소리를 하나 더 했다.

"그 누구가 나지? 니 진짜 너무한다. 그러면 나도 상처 받는다."

"나도 상처 받았어- 볼때마다 산적산적 할거냐?"

"아니 누가 봐도 산적인데 그럼 뭐라고 하냐?"

"그럼 넌 대가리 꽃밭 해."

"뭐야?"

"니네 싸우냐?"

"아니요."

셋이 동시에 대답한 뒤에, 하나 둘 동기들을 챙겨서 집, 아니 숙소로 들어갔다.

그날 나는- 동기애라는 게 뭔지 느낀 밤이었다.

그날 밤, 옆에서 잠을 자는데 코를 고는 산적을 보면서

한대 때리고 싶었기에 코를 살짝 쳐버렸다.

산적은 자다가 날벼락이었기에 코를 쥐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아 산적을 보다가, S와 진진이를 번갈아 보다가 누웠다.

술이 취한 밤은-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술을 마실 때마다 가끔 그 때를 떠올린다.

검은 바다 앞에서 끝없이 빠른머리를 치던 시간,

나만 잘하지 않고 동기들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시간,

그리고- 나도 모르게 외친 동기들 사랑한단 마음.


그 마음은, 5992일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진진이, 용용이, 밍밍이, S, J, 외에도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끝까지 남아서 한 해를 보낸 일곱 명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 친구들과 함께 있는 단톡방은,

아직도 웃음과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내 마음의 작은 타임캡슐 같다.

나의 반짝거리는 20대를 함께한,

나의 추억들이 가득한 나의 동기들.

지금도 많이 사랑해, 21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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