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우리였던 순간

(feat.신입생/재부산 대학검도 시합)

by Rachel

내가 다친 후로 놀라운 사실은, 우리 동기들이 끈끈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여름 MT까지만 해도 겉도는 느낌이 강했던 터라,

내가 다쳐도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나는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다친 날도, 다음 날도 꿋꿋이 학교를 나섰다.


많이 걱정해 줘봤자, 한때고 각자의 학과 생활로 바쁘니 나를 챙겨주는 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참 놀라운 일이었다.


나를 그렇게도 극도로 경계하던 산적이, 나를 많이 챙겨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놀랍기도 했지만, 무섭기도 했다.

나를 챙기는 산적의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내가 놀라든 말든, 묵묵히 산적은 나를 챙겼다.

그래서 나도 오기가 생겨 한번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 나 싫어한다며. 대가리 꽃밭이라서. 그런데 왜 도와줘?"

"대가리 꽃밭이라도, 불쌍한 건 불쌍한거야.

그 다리로 어떻게 학교 다닐 생각을 하냐. 불쌍해서 도와주는 거지."

그 대화가 가슴을 찔렀다.

따끔따끔한 느낌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그런 생각이라면, 안 도와줘도 돼. 난 안 불쌍하니까."

"니 꼴을 봐. 안 불쌍한 사람이 있겠냐?"

"......."

반박할 수 없는 말에, 나는 분하기에 앞서서 속상했다.

불쌍하기 때문에 도와준단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

그래서, 그 애의 금기어를 나도 모르게 쿡 찌르고 말았다.


"거짓말- 란란이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나랑 란란이랑 친하니까!"

"너 그 드립은 왜 나오냐? 여기서 란란이가 왜 나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자, 산적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드립이 아니라- 맞잖아. 아냐?"

"아니야. 난 란란이처럼 자기 일 알아서 잘 하는 사람이 좋은 거야.

널 돕는 것도, 같은 학과인 내 일이니까 돕는 거야."


아닌가? 나라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누구에게나 다정한 순간을 보여주고 싶을 것 같은데.

왜 저런 걸까.

그리고- 나를 챙기는 게 같은 학과인 자기의 일이라니.

씁쓸한 느낌에, 나는 많은 생각을 하며 그 애의 눈을 들여다봤다.

무미건조한 검갈색 눈동자.

그리고 표정 없는 얼굴.

정말로, 의무감만으로 나를 돕는구나.


왜일까, 그 의무감이 가득한 다정함이, 마음을 찔렀다.

나는- 그 다정함이 왜인지 모르게 차갑게 내 마음을 찌르는 비수 같았다.


그 다정함과 의무감이 뒤섞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산적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학과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같은 학부생.

동기이면서도 가장 먼 이질적인 사람.


그래서일까-


신입생 시합을 가서도, 산적을 응원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신입생 시합 날, 나는 2시간 전까지도 갈지 말지를 고민했다.

나는 참가하지 못하는 분함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하지만, 그래도 가고는 싶었다. 우리 동기들의 시합이었다.

그래서, 무거운 깁스 다리를 이끌고 어찌저찌, 경성대로 도착했다.


경성대의 경사로는 우리 학교와는 달라서,

낮은 경사로와 낯선 위치에 땀을 조금 흘리긴 했지만 그래도 잘 도착할 수 있었다.

택시를 타면 빨리 도착했을 텐데, 학생인지라 그런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

낑낑대면서 도착한 경기장은 이제 막 경기를 시작한 듯, 어수선했다.


심판들이 모이는 가운데, 경기장은 2개로 이뤄어져 예선전을 치르느라 어수선한 가운데,

은이 선배가 나를 보고 불렀다.

"D야! 다리도 아픈데 왜 왔어!"

"오늘 우리 동기 시합날이니까- 나는 못 해도 응원만큼은 할 수 있잖아요."

쓰린 마음을 웃어 넘기며, 나는 경기장 한 쪽에 착석했다.

양쪽 발목에 깁스를 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동기들을 응원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있었다.

동기들은 시합 준비를 하다가 하얀 깁스를 한 채로 온 나를 보고 다들 놀라워하더니 말했다.

"란란이도 곧 온댔어. 너도 진짜 대단하다!"

활짝 웃는 용용이와 진진이를 보면서 나는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너희 시합인데 어떻게 빠지냐! 내 몫까지 잘 해서 우승하자!"

"그래, 우승함 해보자!"

우리는 함께 소리쳤고, 그런 우리를 경성대 학생들과 다른 학교 학생들이 흘겨보는 것을 느꼈다.

특히, 나의 다리를 보는 시선들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러면 뭐 어떤가-

응원 왔으니 잘만 하면 되지.


오기 전, 망설였던 마음을 뒤로 한 채 나는 한껏 열정적으로 외쳤다.

"D대 파이팅!"

"용용이 파이팅! 진진이 파이팅!"

목소리에 한껏 마음을 담아 소리를 질렀다. 그날 나는 목소리가 쉬지도 않았고, 지치지도 않고 동기들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 결과, 우리는 1위와 3위로 신입생 시합에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물론, 산적은 유단자라서 신입생 시합이 아닌 유단자 시합에서 따로 결과를 받았다. 결과는 3위.

산적의 시합에서 나는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목이 죄이는 느낌이었다.

잘 응원을 못 하는 나와 다르게, 선배들과 동기들은 산적을 열심히 응원했다.


재부산 재학생은 아니지만,

1학년 유단자들 중 고수에 속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올라온 산적은-

눈부셨다.

호구를 벗기 전까지는.


호구를 벗으면 그 특유의 빙구 웃음이-

덧니와 함께 어우러져 사람을 순박하게 보이게 했었다.

나는 그 시합에서, 진짜 산적의 순수한 얼굴을 봤다고 생각했다.

호구를 벗으며 수줍게 웃는 저 모습이 진짜 얼굴이구나.

정말 순수하다- 라고, 그렇게 느꼈다.



시합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했다.

단 한 번도 가까워지지 못한 사람의 웃음이,

내 마음을 너무 가까이 건드려 버린 것 같았다.

소금을 만난 상처처럼, 무척이나 따가운 생살이 드러나버린 느낌이었다.


그 때의 나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 순수한 웃음이 내 마음 속에 짙게 남아버린 걸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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