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그 때가, 아마 중간고사 준비 기간이었다.
그 애와는 5월 중순 이후로 말 한마디도 못 나눈 채, 어느덧 시간이 흘렀다.
그 애의 반 앞을 지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괜히라도 H 반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H가, 그 애만큼이나 편했으니까.
6월 첫 주의 점심시간, 나는 H와 시험 문제로 의논할 일이 있어서, 앞 반 교실을 찾았다.
H의 반, 창문 너머로 H의 뒷모습이 보였다.
H는 늘 그랬듯, 교실 뒷문 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익숙한 마음으로 그 쪽으로 다가갔고, 입을 열려던 찰나—
그 옆에서, 전혀 낯선 얼굴이 나를 불렀다.
“너, H 친구지?”
깜짝 놀라 한 발 물러섰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내 이름도 부르지 않고 다가온 말투가 이상하게 자신만만했다.
그 아이가 바로, V였다.
나는 한 발 뒤로 뒷걸음쳤다.
가까이 다가오는 표정이 안 읽혔다.
교실 문턱에서 잠시 휘청거렸다. 놀란 발이 어디를 갈지 몰라 헛딛었던 거였다.
낯선 얼굴이 너무 가까워 당황한 내 마음이 드러나서일까, 부끄러웠다.
그때였다. 그 장면을 본 H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왔네. 너 괜찮아?”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투에는 분명한 경계가 섞여 있었다.
나는 여전한 얼굴로 V를 한 번 보고, 다시 H를 바라보았다.
“아, 나.”
말이 턱 막혔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작고 떨리고 있었다.
놀란 마음을 수습하듯,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냥... 이야기 좀 하려고 왔어.”
내가 왜 이리도 조심스러워졌을까. 그냥 H에게 시험 문제 말하러 왔을 뿐인데,
V가 끼어드는 순간, 말조차 쉽게 꺼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또, 그 생각이다. 남의 반에 왜 왔냐는 생각.
그 애와의 반에서 겪었던 일들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그런 의미일까. 남의 반에 왜 왔냐는 말?
누구는 그런 말 한마디를 쉽게 던지지만, 그 말 한마디가 나에겐 하루를 흔드는 무게로 다가온다.
나는 오늘도, 어쩌면 또 ‘눈치 없이 굴고 있는’ 걸까?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H, 수학 시험 말인데, 3번 문제 좀 다시 봐줄 수 있을까?”
목소리는 작았고, 그저 ‘내 친구에게 문제 하나 물어보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워졌는지 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H는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넌 내가 왜 그렇게 어렵냐? 그냥 친구잖아. 왜 이래?"
그 말에, 나는 그제야 숨을 쉬듯 웃었다.
복잡했던 감정의 매듭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 편해졌다. 역시, 넌 나의 바다야.
활짝 웃으며, H의 책상 앞에 섰다. 그 순간만큼은 V도 무섭지 않아졌다.
“응, 이거 있잖아-”
말을 잠시 하는데도 따라붙는 시선이 있어도 모른 척했다.
내가 내 친구랑 같이 있는데, 뭐 어쩌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대화가 끝나자, H가 말했다.
“데려다줄게. 같이 가.”
“어? 응.”
평소엔 데려다주지도 않는 애가, 데려다 준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아까의 일도 있고 해서 말없이 따라갔다.
우리 반 앞 복도에 서자, H가 말했다.
“잘 들어가. 너무 놀래지 말고. 너 너무 놀란 거 같더라.”
“어? 어.. 그래.”
내 상태를 귀신같이 아는 H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반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V의 시선- 그게 생각나서.
집에 와서도, 내일 아침을 준비하면서도 그 시선이 자꾸 떠올랐다.
아무래도, V의 표정이, 마음을 불편했다. 동물원 원숭이 보는 것 같은 시선. 그 시선이 불편했다.
H가 데려다준 그 복도는, 오랜만에 외롭지 않은 길이었다.
매일같이 H에게 물어보러 가지는 않았지만 얘기하고 돌아오는 길이 늘 외로웠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오늘처럼 데려다달라고 해볼까? 아니지, 그건 너무 생각 없는 거 같아. H도 공부할 시간이 필요한데.’
별의별 생각을 하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낄낄 웃다가 바로 누웠다.
천장에 붙은 별자리표를 보며 떠오른 불편한 마음에, 나는 등골이 서늘했던 V와의 마주침을 기억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어제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고, 아무렇지도 않게 학교로 향했다.
하지만 그 아침이, 상상도 못한 하루의 시작이 될 줄은 몰랐다. 여느 때처럼 창문을 열고 있었다.
“어. 또 보네.”
“어, 안녕.”
앞반이라 볼 일 없을 아이, V였다.
나는 V의 시선 때문에 어젯밤 마음이 불편했던 걸 떠올렸다. V가 뒷반에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것도 이렇게 이른 아침에, 제 시간을 내서.
“너 이 시간에 자주 와?”
“어, 환기하러 이 시간에 와.”
“남들은 몰라주는 환기, 왜 하는데?”
따지는 듯한 말투에 생채기가 나는 기분. 나는 애써 웃으며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수록, 그 아이와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어딘가 숨이 막히는 감각이 느껴졌다.
숨이 막히는 기분— 썩 좋지가 않았다.
본능적으로, 나는 그 애를 떠올렸다. 나를 편안하게 해주던 사람.
하지만 지금은, 멀어진 거리. 이젠, 쉽게 마주칠 수 없는 사람.
V와 눈이 마주치는 게 싫어, 손목시계를 봤다.
그 애가 오던 시간이 되어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치긴 하는데— 혹시나 그 애가 볼까봐 조바심이 났다.
나는, 그 애와 마주치는 것이 좋았지만, 지금은 싫었다.
오해할 것 같았다.
지난해 H와의 소문으로 멀어졌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공기가 달라졌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조금 편안해진 기분이 들었다.
뭐지? 뒤를 돌아보니—
“어, 왔네.”
그 애였다. 내가 찾던, 나를 편안하게 해 주던 사람.
“어, 너도 오랜만이네.”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네는 V를 보며, 생각했다.
그 애랑, 아는 사이인가..? 너무 경계했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 애가 말했다.
“뭐 해? 질문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아.”
반이 달라진 후 나는, 내 교실 창문뿐 아니라 그 애의 교실 창문도 종종 열곤 했다.
그렇게 하면, 그 애를 멀리서 볼 수 있었다.
창문을 열어둘 때, 복도 저편에서 오는 그 애가 보여서, 그게 좋았다.
그냥, 그 모습만으로도 하루의 시작이 달라졌으니까.
그런데 그 애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말을 건넬 때, 나는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거리.
너무 가깝게 느껴지는 그 거리가, 내게는 오히려 더 멀게 느껴졌다.
그 애가, 내 마음 속의 결까지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들어와.”
“어.”
얼떨떨한 채로 그 애를 따라 그 반에 들어갔다.
세 달만의 그 반은 그대로였다.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빼면.
그런데, 내가 뒷문으로 따라 들어가자 그 애는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드르륵, 탁 하고 미닫이 특유의 소리가 났다. 나는 닫힌 문을 보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
나, 나가야 하는데.
“잠깐 있다 가.”
“......”
아, 다 봤구나. 내가 곤란해 하는 거.
그리고 스륵하고 누가 문을 잡는 소리가 들렸다. V가 말했다.
“왜 둘만 있냐, 나도 껴줘.”
“..!”
아, 또 불편해지나. 이 반에 갇혀서..?
“이제 너희 반 가. 볼일 끝났으면.”
“아니, 니가 뭔데-”
“나, 이 반 반장이야. 그러니까 우리 반에 들어오지 마.”
나 대신, 그 애가 말해주는 게 고마웠다.
내 곤란함을 봐서, 그래서 해 주는 거구나.
고맙게 느껴졌다. V가 멀어지는 게 느껴진 뒤에야 나는 말을 걸었다.
“고마워. 곤란했는데 도와줘서.”
그리고, 이제는 가야겠다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 애가 대답했다.
“너, 앞으로-”
뒤를 돌았다. 이상하게도, 그 애의 표정이 안 읽혔다.
뭔가를 말하려다가 한숨을 푹 쉬더니, 그 애가 말했다.
“질문 있으면 와. 난 너 안 귀찮고, 안 불편해.”
“-진짜?”
“그럼 넌, 내가 너 귀찮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했어?”
“어. 그건 아니지만, 너희반 애들이 나를 싫어하니까.”
“걔들은 걔들이고, 나는 나지. 왜 그렇게 생각을 해?”
잠깐, 왜 나한테 이래. 왜 따져?
울컥해서, 나도 따졌다.
“왜 그래? 내가 너희 반 애들 불편하게 하니까, 네가 반장이니까. 그래서 안 온 거야. 그게 왜 따질 일이야?”
눈물이 후득, 떨어질 듯 말 듯.
“앞으로 질문 할 거 있으면, 와. 나는 네 질문, 편하고 좋아. 내가 발전할 수 있으니까.”
눈물이 그렁거리는 걸 봤나, 그 애의 말투가 다시 다정해졌다.
“그러니까, 앞으로 올 때는 머뭇거리지 마.”
“어.. 응.”
그 날의 점심시간. 나는 그 애의 말이 떠올랐지만, 쉽게 그 반에 들어갈 수 없었다.
V의 시선이 남긴 감각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 애가 했던 말들, ‘너희 반 가, 우리 반에 들어오지 마.’
그 말은 분명 고마웠는데, 왜 내 가슴 한쪽은 조여들 듯 아픈 걸까.
그 애가, 내 편을 들어준 게 맞는데. 왜 나는 그 반 앞에 서지 못할까.
아직은 조금 무서웠던 거 같다. 그 날의 그 시선과 말투가.
아니, 어쩌면 나는, 3월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걸어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일주일 정도 지난 후에야, 나는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 애의 말, 내가 귀찮지 않다는 말이, 나를 그 반 앞으로 다정하게 밀어주었다.
심호흡을 하고, 문제집을 잘 살펴본 뒤, 뒷문을 향해 다가갔다.
일주일 전의 아침처럼, 그 자리 그대로 그 애가 앉아 있었다.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를 하려고 두 발짝 걷는데, 누군가가 말했다.
“와, 쟤 또 왔어. 낯짝도 두껍다.”
그 순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게, 니가 우리 반에 왜 와? 뻔뻔하게.”
적대적인 시선, 그건 참- 나를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처음은 O, 그리고 O와 함께 있던, 남자아이의 말이었다.
“니가 뭔데 우리 반에 와? 니가 뭐라도 돼?”
앞까지 와서 비꼬는 O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애들의 말은 사실이니까.
나는 그 반에서 타인이 맞고, 그 반 아이들이 적대하는 게 당연했다.
뾰족한 그 말끝이, 마음을 찌르는 게 아팠다.
눈물은 안 나는데, 마음에서 눈물이 나는 것 같이 코가 매워지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발끝만 봤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찰나의 몇 초가 참 길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포기했다.
문제집을 꼭 쥐고,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학생이면 누구나 교실에 들어올 수 있어.”
“쟤 편 들어?”
“아니. 사실을 말하는 중이잖아. 여기가 학교라서, 이 학교 학생이면 누구든 교실에 들어올 수 있어. 외부인만 아니야.”
“쟤 편 드는 거 맞네! 너 우리 반 반장이잖아!”
“반장은 맞지. 근데 그 이유로, 너희 친구들 출입을 제한하면 좋겠어?”
“아니.”
“그래도 쟤 편 드는 건, 너무해. 넌 우리 반 대표잖아.”
“대표도 자기 친분 정도는 있잖아. 쟤는 내 친구야. 그렇게 생각하면 너희가 지금 하는 건, 내 친구 괴롭히는 거야.”
“그래도 우리는 너를 생각해서 하는 거야. 쟤가 수시로 질문하러 오면 너는 공부 언제 해? 바쁘잖아!”
“질문 하는 거에 대해서 얘기 하는것 같은데, 난 질문 받는 거 좋아해. 질문 하면, 내가 발전할 수 있어서 더 좋아. 그런데 너희는 나한테 질문 한번 안 했잖아. 그리고 수시로 온 적도 없어. 중간고사 끝나고, 이번 주에 처음 왔잖아.”
따지지 않는, 단정하고 차분한 말투.
나는 그렇게 하는 그 애가 참 부러웠다.
자신만의 말투, 자신만의 논리가 있는 사람.
“그러니까, 쟤한테 불만 있으면 너희도 질문해. 질문 받아서 대답하면 나한테도 득이거든.”
그 말을 끝으로,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사라졌다.
나는, 그 때 내 발끝이 환해지는 걸 느꼈다. 까맣게 물들었던 그 애에게 가는 길이, 환해지는 느낌.
다시 질문을 하러 가도 될까? 망설이는데, 그 애가 말했다.
“뭐해. 쉬는 시간 다 끝날라.”
“어, 어어.”
멍하니 그 애에게 홀린 듯 다가갔다.
질문에 대답해 주는 내내, 나는 잘 듣지를 못했다. 정신없어하는 나를 알았는지, 그 애가 말했다.
“너, 지금 안 듣고 있지?”
“응? 아, 아니..”
“내 말 다 들었으면, 앞으로도 질문 하러 와. 난 그게 좋아.”
“어... 응.”
무슨 정신으로 대답을 하는지도 모르고, 나는 그 말만 기억했다.
그 반을 나올 때야, 현실을 실감했다.
귀가 뒤늦게 빨개지는 느낌.
부끄러움이, 간질간질함이 뒤늦게 가슴에서 머리로 올라왔다.
왠지 모를 미소가, 입 끝에 맺힌 거 같았다.
간질간질하고, 부끄러운 기분으로,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갔다.
그 날 이후, 나는 그 반에 질문하러 가는 것이 무섭지 않아졌다.
2학기가 될 때까지, 나의 질문은 끝을 몰랐다.
그렇게, 3학년 1학기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