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겨울이 따뜻해서일까, 그 해의 봄은 참 춥게 느껴졌다.
봄은 봄이어서, 복도 창밖으로 각양각색의 봄꽃들이 피는 계절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그 애와 다른 반이 된 걸 알았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마음 한쪽은 스르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같은 학교, 같은 건물, 바로 옆 교실이지만—
그 애는 이제, 내 반이 아니었다.
3월에는 정말 봄 같았는데.
3월에, 그 애의 반 아이들을 확인했을 때,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Y가, 그 반에 있었다.
Y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익숙한 뒷모습을 찾았다.
재혁이도 그 애랑 같은 반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재혁이랑, 다른 아이들 없나 하고 뒷모습을 쫓을 무렵이었다.
"어, 왔네. 넌 몇 반이야?"
그 애였다.
“어, 안녕. 오랜만이네.”
“그래, 청소 하고 나서 되게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어색하게 웃으니, 그 애가 물었다.
“어, 잘 지냈지. 같은 반인 거야, 우리?”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 애는, 내가 다른 반이란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 묻는 걸까.
“아. 나. 너랑 다른 반이야. 그냥, 궁금해서 와 봤어.”
“그래. 그럼 이제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8시 50분 다 되어 가더라.”
“그래, 그럼 안녕.”
반을 돌아 나오는데, 울컥했다.
돌아 나오는 길에 갑자기 바람이 한줄기 부는 느낌이었다.
따뜻한 봄날 햇살 아래 부는 바람이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 애랑 같은 반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고 내 반을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 조금 무서웠다.
2년을 함께했던 교실이었는데. 이제는 나 혼자 돌아서는 공간처럼 느껴지는, 외로움. 그래도, 아직 다행인 건 내 반의 친구들을 모르니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며 우리 반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아침이 왜 그렇게 춥게 느껴졌는지 알 것만 같았다.
문을 열자, 먼저 들어온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J의 친구들.
그 애들이 줄줄이 앉아서, 들어오는 친구들을 훑어보는데- 내 심장이 쿵쿵거렸다.
J는 이미 전학 간 지 반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무리의 눈빛이 무서웠다.
예전처럼 손가락질하거나, 속삭이며 비웃을 것도 아닌데도—
그들 앞에 선 나는 여전히 그 초여름의 나처럼 작아졌다.
그리고 J의 친구들 외에도, 앞반의 아이들이 꽤 많았다.
아무래도, 이번 반은 앞반 아이들이 꽤 섞여 있는 것으로 보였다.
혹시나 그 사이에 H가 껴 있을까 기대했지만, H도 없었다.
4월은 역시, 정말 반 친구들끼리 친해지는 달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날씨도 부드러워지고, 학교 풍경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그 애와는 다른 반이 되었지만, 전혀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침 복도, 환기 루틴에서 늘 마주쳤고, 나는 질문을 하는 일상들이 반복되었다.
점심시간, 그 애가 축구를 할 때 운동장과 마주한 반 창문에서 그 애를 찾던,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4월의 중간고사가 끝나고, 그 평화로운 일상은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중간고사가 끝나자, 아이들의 분위기가 날카로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애의 반이든, 우리 반이든.
서로를 견제하는 눈빛들이 교실 안에 맴돌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2학기 말에 치러질 배치고사 때문이었다.
벌써부터 중간고사 치고 그걸 생각하고 있다니, 확실히 3학년은 3학년이었다.
그래서, 나도 조금씩 공부를 밤새서 하기 시작했다.
배치고사란 긴장감 때문인지, 나도 불안함이 내 발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불안함이 느껴질 때면, 밤을 새서 공부를 했다. 당연히, 낮에는 피곤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애가 없는 교실에서 나는 졸기 시작했다.
졸기 시작하면서 긴장감을 놓았던 것 때문일까?
J의 친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반 아이들이 이상했다.
반장과 부반장을 빼고는— 나를 슬쩍슬쩍 비웃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 화장실을 다녀올 때조차, 내 이름이 묘하게 입술 끝에 맴도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끼리 속닥이는 소리가 꼭 내 뒷담화처럼 들렸다.
J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우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자꾸만 예민해졌고, 그럴수록 스스로가 피해망상증 환자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진짜 내가 이상해진 걸까.
그 애의 반을 가면 마음이 편안했다.
분위기가 그 애를 닮아, 늘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애가 반장이었던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끄러운 아이들은 옆의 복도 끝의 동그란 공간에서 놀았다.
그 복도를 지날 때면 시끄러운 게 들려올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교실 문을 닫으면 그 소리는 들리지가 않았다.
나는 내 예민함을 그 반의 분위기로 무디게 만드는 게 편했다.
그래서 자주, 그 애에게 질문을 하러 가곤 했다.
그 애도 내가 질문하는 게 그렇게 낯선 일은 아니었기에 질문을 받아주고, 대답을 해 주었었다.
그 날의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 날의 일은, 별거 아닌 걸로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 나는 문제집을 들고 복도 너머의 그애의 반으로 향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날은 조금 망설이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 3분 정도만 늘 할애하면 충분했다.
그 애도 익숙하게 문제집을 펴고 설명하려던 때였다.
"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를 찔렀다. 뒤돌아보니 O였다.
4월부터 Y와 친하게 지내던 무리 중 하나였는데, 그 애를 꽤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던 아이였다.
"너, 왜 자꾸 우리 반에 와?"
그 말투는 왜인지 모르게 가시가 돋쳐 있었다.
나는 그 말에 대답을 못 했다. 아무 말도 않고, 손에 쥔 샤프를 쥐었다.
그 애는 당황한 듯, 나와 O를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그만 해."
짧고 단호한 말이지만, 이상하리만큼 내 마음에 그 말이 내려앉았다.
O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얼어붙은 채 서 있다가 문제집을 들었다.
"미안해. 나 갈게."
화끈, 하고 귀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 나 눈치없게 굴었구나. 눈물이 울컥 나오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아냐. 신경쓰지 마."
그 애가 말하는 신경쓰지 말라는 그 말에도, 나는 내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애의 반 친구들이 배척하는 게 맞다고 느꼈다.
나는 그 애의 반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며칠간 그 애의 반에 가지를 못했다.
그 애의 얼굴이 보고 싶었지만, 왜인지 가선 안 될 곳이라고 느꼈다.
나의 발걸음은 항상, 그 애의 반 앞에서 멈추곤 했다. 그 반의 문이 참 크게 느껴져서.
시간은 흘러, 5월 말이 되었다. 한창 더워져서, 교복 치맛자락마저 다리에 감기는 게 싫어질 즈음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반 아이들과 마주치지 않게 화장실로 향했다.
더운 여름이기에, 복도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 복도에 재혁이가 서 있었다.
“재혁아? 왜 나와 있어?”
우두커니 서 있는 재혁이가 이상해 불렀다.
그 애와 함께 있지 않는 재혁이라니. 무슨 일이 있나?
재혁이가 조금 늦게, 천천히 내 쪽을 보았다. 그리고, 재혁이는 내 말을 기다렸다.
“너, 무슨 일 있어? 더운데 왜 나왔어.”
재혁이가 입술을 한번 꼭 다물었다가 말했다.
“그 애가.. 널 기다려.”
“응?”
“쉬는 시간마다. 너 기다린대.”
“어?”
이게 무슨 말이지?
재혁이의 말은 꽤 파장이 컸다.
그 애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아이,
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인데, 그런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은 꽤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재혁이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복도 아니고 춘추복 입고 있는 재혁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이 더운 복도에서 설마 얼마나 오래 기다린 거야. 오늘은 이렇게 더운데.
대체 얼마나 기다린 거야. 설마, 나올 때까지 기다린 건 아니겠지.
“너 여기서 오래 있었어?”
“아니, 잠깐 나왔어.”
“근데 왜 이렇게 땀이 많아.”
“그냥 혼자 나왔어.”
말없이 재혁이의 손을 잡았다.
“가자. 반에 데려다줄게.”
재혁이를 반에 데려다 주러 문을 열자, Y와 눈이 마주쳤다.
그제서야, 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는 걸 느꼈다.
그 반 안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Y와 그 무리들이 그어 놓은 선을 계속 넘나드는, 이방인.
그 반 아이도 아니고, 자리도 없으면서 선을 넘는 이방인이기에 배척받은 거였다.
그 시절, 여자아이들 특유의 무리지음과, 그 선이라는 게 있었다.
‘선’을 넘으면, 무리는 예고 없이 달려들어 말보다 빠른 분위기로 누군가를 밀어냈다.
요즘도 그렇다고들 한다.
어쩌면, 그건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감성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 애의 마음이 짐작되었다.
반에서 반장으로써 책임을 다 했을 그 애.
그리고 그 애를 좋아하던 아이들, 그리고 그 무리들.
그러니까 나를 밀어내는 게 당연했다.
자기들이 그어 놓은 선을 밟고 다닌 건 나였으니까.
그 사이에 끼어서, 그 애가 곤란했을 것을 생각하니 새삼 미안해졌다.
그래서 재혁이를 자리에 데려다준 뒤, 그 애를 흘끗 보고는 반을 나섰다.
눈이 마주쳤지만, 더 이상 나는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 반에서 영원히 환영받지 못할 존재였다.
그 반에서 내가 있어봤자- 그 애에게 방해만 될 존재라고 느꼈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애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고, 나를 향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애의 교실은, 더 이상 나를 향해 열려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