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우리가 말하지 못한 것들

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by Rachel

12. 축제와 아이스티


우리는 축제 일주일 전부터 옥신각신했다.

올해 처음 하는 축제와 체육대회 병행 방식 때문이었다.

체육대회 안에 축제를 함께 치르며, 그 해 처음 도입된 방식이었다.
상품도 어마어마했다.

점수를 합쳐서, 그날 학년 1등한 반은 무려 ‘햄버거 세트 전원 증정’. 당시에는 엄청난 상품이었다.

물론, 전체 1등은 치킨까지 포함이었다.

배고픈 강아지들이었던 우리는 햄버거라는 상품에 꽂혀서 열심히 회의에 돌입했다.



전략적으로 승부하려면, 각 체육대회 종목마다 잘 하는 아이들을 투입해야 했다.

오전이 반 대항전이라면, 오후에는 반 대항전에서 살아남은 팀끼리 토너먼트를 하는, 이른바 피 튀기는 경쟁전이었다.

잘 짜보자고는 했지만, 그 시절 아이들은 아이들이라 아무리 머리를 맞대도 좋은 작전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날의 방문 점수를 극대화 하는 방법이 없나?

어떻게 해야 할까 치열하게 고민하던 친구들은, 최고 마진을 노리자는 내 말에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아니, 그거 뻔하잖아.”
“뻔하니까 하지. 축제엔 음료지!”

“아니- 누구 아이디어냐! 또 아이스티라니! 옆반도, 옆옆반도 하는데. 이거 에바야!”

“그럼 이거 말고, 다른 아이디어 있으면 말 해봐.”

유진이가 말하자, 그 말을 한 아이가 깨갱, 하고 꼬리를 말았다.

“아니, 겹치는 거 뻔한데 다른 건 없어?”
“방금 말했잖아. 누가 말 하지 말래? 다른 아이디어 있으면 말해보라니까?”
유진이의 카리스마 있는 말에,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몇몇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손을 들려고 하자, 그 애가 말했다.

“지금부터 불평, 불만 있으면 말해. 그 애들부터 체육대회에 내보낼 테니까. 난 누가 더 운동 잘 하는지 잘 알거든?”

반에서 남자아이들을 꽉 잡고 있는 그 애의 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진이의 카리스마 때문이었을까?

다들 그 이후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


정리된 의견을 가지고, 우리는 담임선생님이신 P선생님께 의견을 전달했다.

의견을 나누는 내내 듣고만 계시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얘들아. 우리 민주주의 반인데. 너무 독재자 같지 않니?”

“선생님. 근데 의견을 내면 불평불만만 내면 결론이 안 나요. 우리 두 시간째 같은 고민 했잖아요.”

유진이의 똑 부러진 말에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소수 의견도 좀 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니까.”
“네.”



어쨌거나, 우리는 축제 때 아이스티를 만들어 팔기로 결정을 했다.

그날 오후, 교무 회의에 다녀오신 선생님께서 알려 주신 사실은, 다른 반도 꽤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점이었다.


체육 대회에 잘 하는 애들을 배치하고, 나머지 애들은 부스에 남아 부스를 지키면서 아이스티나 음료를 팔자는 계획이 다른 반도 있음을 알게 되자, 누군가 말했다.

“아니, 이렇게 겹칠 거 뻔한데 뭐 하러 해. 딴 거 해.”
“딴 거 뭐 할 거야?”

“어. 그게.”

“내가 말했지? 다른 방법이나 아이디어 있으면 제시 하라니까? 꼭 다른 방법 없는 애들이 불평불만이 많아.”

유진이의 팩트폭행에 볼멘소리로 그 아이가 중얼거렸다.

“아니 무슨, 독재자냐.”

“독재는 무슨 독재야. 니가 다른 대안 없이 얘기했잖아.

대안 없이 얘기하면 그게 불평밖에 더 돼? 의견 나눌 때 미리 얘기하든지. 지금 불평하면 불평분자지.”

희재의 말에 그 애가 말했다.

“맞아. 의견 나눌 때 미리 말을 했으면 괜찮았겠지. 그런 고로 P, 넌 나랑 같이 축구하러 가자.”

졸지에 반 대표 축구선수가 된 P는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아니, 나 축구 잘 못하는데.”

“아까 내가 그랬지, 누가 운동 잘 하는지 안다고. 너도 축구 꽤 하는 걸로 아는데?”

“어. 그래.”

“그럼, 이제 체육대회 나갈 애들 뽑자.”

유진이의 빠른 회의 진행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운동은 젬병이라 진짜 안 뽑히기를 바라며 열심히 회의에 참석했다.


운동은 쥐뿔도 못하고, 힘도 없으니 안 뽑히고 부스 준비하는 게 나으니까.

하지만 내 기대를 배반하듯이, 나는 줄다리기에 뽑혔다.


“아. 나보다는 다른 애가 낫지 않아?”

“이것도 정한 거니까, 불평 하지 마.”

유진이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불평이 아니라, 나는 힘을 잘 못 쓰니까 그래. 나 말고 다른 친구들은 안 돼? 민폐면 어떡해.”

“그래도 해. 다른 애들도 하잖아.”

같은 줄다리기 조에 들어간 그 애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할게.”


이제, 메뉴를 정했으니 당일이 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건 ‘얼음’과 ‘물’이었다.

축제 3일 전부터, 얼음은 각자 집에서 반찬통 하나씩 그리고 마트에서 사오는 얼음으로 채운 뒤 우리는 물 전쟁을 시작했다.


급식소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는 단 두 개, 그리고 차가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는 24개.


우선 선점해야 할 뜨물팀을 먼저 보내고, 나는 찬물 팀으로 갔다.

전투조인 뜨물팀이 급식소로 달려갔지만, 찬물조보다 늦게 도착했나 보다.
저 멀리서 탄식 소리가 들렸다.


“야야야, 지금 선배들 벌써 수도꼭지 잡았다더라!”
“지금 안 가면 진짜 미지근한 물밖에 안 남아!”

“니네 빨리 뛰어!”

“꼭지 한 개 남은 거야! 빨리!!”

찬물팀이 뜨물팀을 마구 푸시하는 그 순간이었다.

옆반 애들이 터덜터덜 돌아오는 걸 보고 놀라 물었다.


“어? 너네 왜 거기서 나와?”

“선배들이 수도꼭지 다 차지했어. 1시간 뒤에나 오래.”


일단은, 찬물팀은 물을 받아오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으므로, 조용히 물을 받았다.

그리고 흘끔흘끔, 뜨물팀이 가야 할 수도꼭지를 스캔했다.

선배들의 주의가 조금 흐트러진 틈을 타, 뜨물팀 한명이 잠입에 성공했다.

“야! 너 몇 반이야?”

선배 한 명이 약간 위협적으로 말하자, 잠입에 성공한 친구가 말했다.

“선배, 저희도 좀 써야 돼요. 이거 한 통만 받아 갈게요!”

“아니, 다른 반 애들도 다 갔어. 너네도 한시간 뒤에나 와. 이 수도 데워지려면 30분 정도 걸려.”

“딱 한번만요~”

애교가 많은 친구 덕분인지, 한통은 사수가 가능했다.



“자, 후배님들. 이제 한통 받았으니 선착순으로 오세요~ 늦게 와놓고 새치기 안 돼요!”

“아, 한통만 더요! 제발요! 저 뜨물팀이에요!”

“안 돼요. 뒤에 친구들 눈 번뜩이는 거 안 보여요?”

말투는 느긋했지만 내용이 참 얄미웠다.

찬물팀이 받아 놓은 물을 들고 우리 반의 부스로 터덜터덜 가는데, 담임선생님이 보였다.


“얘들아. 힘들지?”
“어? 선생님! 그건 뭐예요?”

“선생님이 너희를 위해 가져왔지! 이거 교무실 꺼니까 쓰고 반납 꼭 해야 해?”

“네!”


하얀색 전기 포트. 선생님이 들고 오신 거였다.

커피를 즐겨 드시는 선생님들을 위한 교무실 비품이었는데, 선생님이 슬쩍 해 오신 거였다.

교무실에서 막내뻘인 담임선생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얀 전기 포트를 가져 오시다니!

찬물팀에서 조금 열혈남아였던 친구가 소리쳤다.

“선생님을 위해서! 오늘 1등 하자!”
“좋아! 파이팅!”

“선생님! 사랑해요!”


물 전쟁이 끝나고, 내가 밖에 나가게 된 건, 반 대항 줄다리기였다.

음료팀이었던 나와 친구들은 선생님이 부스를 지키겠다 하셔서, 줄다리기 대표로 줄 앞에 섰다.

앞에는 남자들이 대다수인 3학년 선배들이 서 있었다.

그 선배들만 이기면, 우리는 전체 1등을 할 수 있었기에, 비장한 마음으로 줄 앞에 섰다.

나는 키가 제일 작았기에 맨 뒤에 섰다.

잘 하든 못 하든 무조건 누워서 버티라는 유진이의 말에, 누울 각오까지 한 상태였다.


앞치마도 벗었겠다, 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열심히 해내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그 애가 내 뒤에 섰다.

“왜 여기 와 있어? 원래 맨 앞이었잖아.”

“맨 뒤가 안 끌려가면 이길 수 있어. 그리고 너 힘 약하다며. 힘 약하면 누워도 못 버텨.”

“어. 그러면 잘 부탁해.”


나는 그 때, 그 애가 왜 왔는지 몰랐다.



세 판 중 첫 번째. 줄다리기에서 제일 중요한 건, 초반에 상대의 기세를 꺾는 거였다.

힘을 잘 쓰는 아이들이 앞줄에 서야 했고, 작전상 그 애는 늘, 앞줄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나보다 뒤에 있었다.

그 이유를,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나는 말없이 줄을 움켜쥐며 그 애를 흘끗 돌아봤다.

귀가 조금 발그레해져 있었다. 나도, 귀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줄을 꽉 쥐었다.



줄다리기는 꽤 힘들었다. 3판 2선승제, 우리가 첫 판을 이겼다.


그런데, 두 번째 판에서는 힘없이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누워서 버티려고 하는데, 그 애와 팔이 닿았다.

깜짝 놀랐지만 좀 더 버티려는 찰나, 정말로 질질 끌려갔다.

당연히 뒤에 있던 우리는 흙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맨 뒤에 거의 눕다시피 한 그 애가 걱정되어 물었다.



"너, 팔꿈치랑 다른 데 괜찮아? 쓸렸어?"

"괜찮아. 축구하다 넘어진 것도 아닌데. 넌 쓸린 데 없어?"

“응, 괜찮아. 다음이 마지막인데… 너, 뒤에서 괜찮아? 앞에 가야 하는 거 아냐?”

그 애는 줄을 내려다보며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음… 전략적으로 생각하면 그래야 할 거 같아.”

그러고는, 아주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너도 앞으로 가자.”


괜히 웃음이 났다. 꼭 같이 가자는 말 같아서.

마치, 떨어지지 말자는 말 같아서.



웃음과는 달리, 우리의 결말은 참 슬펐다.

기세도, 응원도, 기적도 동원하며 다들 젖먹던 힘까지 꺼내 쓸 것처럼 당겼는데.

3학년 선배들은 정말로 힘이 셌다. 줄은 천천히 끌려갔다.

누워서 버텨도 안 됐고, 손과 팔에 힘을 줘도 안 됐다.

그냥 졌다.

아쉬운 마음에 다들 서로 옷을 털어 주는데, 나는 그게 너무 아까웠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길 수 있었는데.



줄다리기에서 지고, 흙먼지를 털며 부스로 돌아왔다.

다시 앞치마를 두르고 음료팀으로 복귀했다.

희재와 나는 다시 앞치마를 두르고 아이스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때, 그 애가 왔다.


“어, 승이 왔네. 음료 줘?"

희재가 그 애에게 방금 만든 아이스티를 건넸다.

아이스티를 마시던 그 애가 말했다.

"방금 축구하다 와서 목말랐는데 고마워. 나 땀 냄새 안 나?"

“어? 무슨 땀냄새가 나. 지금은 그런 냄새 나도 멋있지. 너 지금 우리 반 위해서 열심히 축구했잖아. 그거 좋은 거야. 칭찬받아도 되는데?”


너무 간지러운 칭찬이었을까, 컵을 꺼내던 희재가 말했다.


“웃기고 있네. 너네 덤앤더머냐?”

“아니 덤앤더머라니. 개그 콤비 안했거든.”

그러다가, 희재가 먼저 웃었다. 그리고 그 애와 나도 같이 웃게 됐다.

아무도 오지 않는 급식소의 음료 만들기 현장에 웃음꽃이 폈다.



“아, 근데 진짜 아깝다. 아까 줄다리기.”

내가 볼을 부풀리며 아쉬움을 드러내자, 그 애가 웃으며 말했다.

“너 진짜 푸린 같아.”

“뭐? 푸린이라니!”

나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그 말에 발끈했다.

그런데, 옆에서 희재가 다시 해보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다시 볼을 부풀렸고, 희재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딱 맞는 말이다. 푸린 맞네. 그 볼 빵빵한 포켓몬.”

나는 찔려서 말했다.

“에이, 푸린은 노래 잘하잖아. 나는 아닌데?”

그 애가 웃으며 말했다.

“볼 부풀리는게 진짜 닮았어. 그리고.. 넌 아이스티 잘 만들잖아.”

텅 빈 급식소 한쪽, 우리는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언제까지 만드나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선생님이 급식소로 들어오셨다.

“부스 끝났다, 얘들아. 음료 만드느라 고생했어.”

“와~ 진짜요? 그럼 이제 가서 구경하면 되겠네요!”

“그 전에, 우리 고생한 친구들 사진 찍을까? 선생님 사진 찍는 거 좋아하잖아. 오늘도 한 장 남기자.”

우리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급식소 벽을 배경으로, 앞치마를 두르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도 정리하지 못한 채.
희재가 앞에 있는 의자에 앉고, 나는 희재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선생님을 보고 웃었다.

“하나, 둘 셋- 김치!”

“김치!”

사진이 찍히는 찰나, 나는 그 애를 향해 웃었다.

그 애도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걸 발견했다.

둘 다, 웃고 있었지만, 우리의 웃음 뒤에 스친 마음 하나가, 밤새 내 마음을 노크했다.





열세 번째 이야기는,

서로 다른 교실에서 다시 마주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멀어진 줄만 알았던 그 마음이

여전히 가까웠던 그 시절을, 함께 걸어가요.



keyword
이전 15화그 때, 우리가 말하지 못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