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그 날의 소풍은 참으로 길었다.
가을날의 그림자처럼, 긴 하루였다.
D산은 꽤 넓고 높은 산이었다.
중간쯤에 사찰이 있어, 그곳에서 잠깐 숨을 돌린 뒤, 다시 정상을 향해 걸었다.
땀이 흠뻑 젖도록 오르고 나서야 드디어 정상에 도달했다.
가을이 되어, 하얀 갈대밭. 바람에 갈대의 솜털이 눈처럼 흩날렸다.
그 광경을 보며 예쁘다고 생각하며 걸었다.
반별로 다시 모여 열을 맞춰 걷는 동안, 내 뒤에는 재혁이와 그 애도 있었다.
뒤통수가 따끔할 때마다, 돌아보면 어김없이 그 애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귀가 또 다시 홧홧해진 것 같았다.
평소엔 물을 잘 마시지도 않던 나였는데, 괜히 물을 자꾸 마시며 열을 식히려 애썼다.
“목 마르대요~ 목 마르대요~”
재혁이가 장난스럽게 놀렸다. 그날 따라 재혁이는 눈치가 참 빨랐다. 그래서 더 얄미웠다.
그러고 보니, 재혁이는 1학년 봄 소풍에도 있었다. 그 애와 함께.
내 인덱스 프린트에도 늘 함께 찍혀 있던, 그 애처럼.
딴 생각을 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D산 정상, 차로도 올라올 수 있는 평평한 들판이었다.
우리 반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둥그렇게 앉았다. 담임 선생님이 소풍의 백미라며 수건돌리기를 제안했다.
처음 수건은 유진이에게 넘어갔다. 축구를 하던 아이답게 달리기가 빨랐다.
첫 바퀴에 술래가 잡혀 재미없다며, 선생님은 이번엔 수건을 그 애에게 건넸다.
그 애가 달리는 모습을 보며, 문득 자전거가 떠올랐다.
봄 소풍 때, 그 애는 자전거를 탔었다. 그 자전거가 내 독사진 프레임에 들어왔던 것처럼—
그 해의 수학여행 때도 그랬다. 내가 찍은 사진마다, 그 애가 어딘가 희미하게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 애를 찍으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사진엔 늘 그 애가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아차릴 즈음, 그 애의 손에 들린 수건이 한 바퀴를 돌고 있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이번엔 그 애가 어디에 앉는지 확인했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 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처음 본 날의 미소였다.
‘어… 잠깐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그 순간, 그 애의 손에서 수건이 사라졌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내게 떨어진 건 아니었다.
대신, 옆에 앉은 윤영이 뒤에 수건이 놓여 있었다.
“윤영아, 수건 있어.”
“어? 진짜네.”
나는 내게 수건이 떨어지지 않길 기도하면서도, 어쩌면 떨어지길 바랐는지도 몰랐다.
윤영이가 수건을 들고 힘껏 한 바퀴를 돌았고, 그 애는 내 옆에 앉았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그 애에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무심코 양반다리를 풀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내 심장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너, 표정 진짜 이상해.”
“어, 응.”
정말로, 내 귀가 빨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내 뒤로 사락— 수건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알았다.
아, 나는 이제 이 애 옆에 앉을 수 없겠구나.
얼굴이 너무 벌개진 건 아닐까 걱정하며, 태연한 척 일어났다.
누군가 내 표정을 보면 내가 그 애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차릴까 봐,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천천히 뛰었다.
그리고 도착한 자리는— 윤영이의 옆이었다.
그 옆에 앉으니, 가슴 한쪽이 서글펐다.
나는 내 감정이 들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애는 내 얼굴을 다 봤을 테니까.
그래서 이제 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가긴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시야에 그 애가 들어왔다.
나는 앉았는데, 그 애는 앉기가 무섭게 뛰고 있었다.
우리 반 여자아이들이 그 애를 좋아했기에, 그 애는 계속 자리를 옮기며 수건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 애가 앉는 자리마다 내가 고개만 돌리면 시선이 닿는 곳이었다는 걸.
마음이 닿지 않는 대신, 시선이라도 닿기를 바랬던 걸까.
점심을 먹을 때, 그 애는 재혁이와 다른 친구들과 웃고 떠들었다.
나 역시 친구들 틈에서 태연한 척 이야기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내내 서로가 앉아 있던 자리는 언제나 서로의 시선 안에 있었다.
수건 돌리기의 웃음이 잦아들고, 잠깐의 휴식을 가진 뒤, 우리는 다시 하산길에 올랐다.
선생님의 종례 후, 우리는 삼삼오오 흩어져 내려갔다.
다음 날이 주말이라 다들 피곤한 듯 말이 없었다.
나도 윤영이와 함께 말없이 걸었다.
지는 햇살이 비스듬히 내 머리칼을 비추고 있을 즈음, 거의 다 내려왔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 애와, 그 애의 친구들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말 대신, 눈빛을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그날은, 내게 가을날 길게 비치던 햇빛으로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