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우리가 말하지 못한 것들

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by Rachel

10. 소풍, 그리고 느린 걸음


1학년 때 내가 만난 재혁이는 마법사 같은 아이였다.

재혁이는, 걸음이 느린 아이였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아이들 사이에서 꽤 놀림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재혁이를 봤을 때는 말갛고 뽀얀 얼굴에 안경을 써서, 한국에 있는 해리 포터 같은 느낌이었다.


재혁이는 큰 소리를 들으면 놀란다는 말을 듣고, 우리 반 아이들은 각별히 신경을 썼다.

재혁이가 놀라지 않도록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재혁이는 언제나 솔직했다.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했고, 자기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친구들에게도 직설적인 말투였고, 그래서 가끔은 거울같이 너무 솔직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 재혁이는 반의 인기인인 그 애를 종종 독차지하곤 했다.

아마 선생님이 넌지시 그 애에게 "잘 챙겨줘"라고 부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애도 책임감이 있는 아이였으니, 그 말이 없어도 챙겼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내 조심스러운 추측일 뿐이다.



재혁이와 함께한 1학년의 소풍날은 대공원에서였다.

재혁이랑 다니던 그 애는 S와 함께 자전거를 탔고, 나는 친구들과 사진을 찍느라 그 애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 즈음, 자전거를 타는 그 애의 모습을 보고 부러워했을 뿐이다.


나도 자전거를 탈 줄 아는데.

그 애가 아주 잘 타는 것도 부러웠고, 넓은 대공원을 자전거로 누비는 두 아이가 부럽기도 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대공원을 자전거로 달릴 수 있었지만, 그때 그들만큼 신나게 달리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부러웠던 건 자전거가 아니라, 끈끈하고 즐거워 보였던 두 사람의 우정이 아니었을까.


1학년의 소풍이 지나고 사진을 현상하러 갔을 때 나는 놀랐었다.

현상소에서 준 인덱스 프린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진은 36컷이었는데, 그중 20컷 이상에 그 애가 찍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사진을 찍을 때마다 프레임 안 어딘가에 그 애가 있었다.

나는 내 마음을 잘 몰랐지만, 그 애를 바라보고 싶었던 마음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리고 그 애를 찍은 사진 속, 희미하게 같이 있던 아이가 재혁이라는 걸 아주 나중에서야 알아차렸다.

1학년의 소풍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지만, 그 사진을 보고 나서야 내 마음이 시각화되었음을 깨달았다.



2학년 봄의 마음은, 아마도 그 인덱스 프린트 때문에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 같다.



2학년의 소풍날은 CA 사건 이후였다. 그날은 무척 복잡한 날이었다.

CA 사건 때, 유진이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나와 H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던 유진이는 그제야 그 애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나 보다.


소풍날, 첫번째 집결지에서 유진이가 말했다.

"나는 포기했어. 그러니까 잘해봐."

"뭘?"

"얘 또 모르는 척하네. 너, 네 마음 얼굴에 다 드러나는 거 모르지?"

"어? 내가 그래?"

"그래. 그러면 진짜 재수 없어 보여."

"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잘해 보라고. 응원할게."

"응."


뭘 잘해 보라는 걸까. 나는 이미 그 애와 거리가 생겼는데.

한숨을 푹 쉬고 두번째 집결지로 향했다.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일단, 오늘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었다.

소풍이 끝날 때까지, 마음이 들키지 않게.




"안녕."

"어, 안녕."

산으로 올라가는 길, 두번째 집결지에서 그 애와 마주친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CA 사건 이후, 나는 다시 그 애와 어색해졌다. 아침에 만나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우울해도 그 애에게 들킬까 봐, 혼자 마음을 삭인 적이 많았다.



1학년 때, 그 애는 귀신같이 내가 우울한 틈을 알아채곤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2학년이 되면서는 그럴 틈도 없을 만큼 일이 많았고, 이제는 그 손길조차도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그 애를 좋아한다는 걸 알던 봄,

그 감정은 봄바람처럼 가벼웠는데,

지금은 겨울바람처럼 서릿발이 이는 것 같았다.



두번째 집결지에서 단체 사진을 찍기 전, 나는 그 애를 피하려고 맨 마지막에 앞에 섰었다.

햇빛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자리. 눈을 감을 걸 알면서도, 일부러 무릎을 길게 뻗고 앉았다.

햇빛 때문에 눈을 감은 사진은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지만, 그 애와 멀리 있는 사진이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사진을 찍고 나서, 한 반씩 출발을 할 때였다.



"잘 해봐."

유진이가 올라가며 남긴 말.

잘 해봐…라니. 뭘.

나는 지금 그 애와 마주치지 않는 게 더 중요했는데.

아니, 그게 정말 중요한가?

그 애와 마주치면— 내 마음을 이야기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내가 너를 좋아했다가… 어, 지금은 아닌 것 같다고?'

뭘 어떻게 설명하지? 머릿속이 엉켜서인지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뭐라고 말을 해야 간단명료할 수 있지?


걸음이 멈췄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뒤에 올라오던 4반 아이들이 말했다.


"너 지금 벌써 지쳤냐?"

"쟤 체력 봐. 저것밖에 안 되나 봐."

낄낄거리며 올라가는 남자애들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일찍 올라가야 마주치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데 이럴 수가. 내가 좀 늦게 올라갔다고 생각한 그때, 그 애가 있었다. 재혁이와 함께.



"어, 너."

"안녕, 재혁아."

"왜 여기 있어? 우리보다 먼저 출발했는데?"

"어, 그냥 지쳐서 좀 쉬다 보니까."

"어, 그래. 근데 말이야. 너, 걔 좋아하지?"

"응?"

"내 옆에 있는 승이. 너 좋아하잖아."

"어어?"

당황하면서 귀가 빨개졌나 보다. 귀가, 얼굴이 뜨거워졌다.

"재혁아, 그렇게 말하면 당황해 하잖아."

"그래도, 너 보는 눈빛이—"

"그만 하고, 올라가자."

"야, 니네 사귀지?"

"뭐?"

당황한 내 말이 더 크게 울렸다. 앞서 가던 애들도 돌아볼 만큼.

"아, 아냐. 우리가 뭘 해."

"사귀는 거 맞는 거 같은데. 니네 사귀는 거 맞지? 선생님! 얘네 사귄대요~"

한번 놀리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재혁이 성격상,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 먼저 갈게. 산 정상에서 봐."

"그래."

"재혁이 잘 챙겨서 와. 아니면 선생님이랑 오던가. 가서 보자."


후닥닥 자리를 벗어나면서도 내 걸음은 느렸다.

귀는 홧홧했는데, 그게 산을 올라가서 느낀 체력 부족인지, 아니면 놀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산을 올라가면서도 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생각을 멈추고 올라가야 안 다치는데. 새로 산 신발 생각을 할까? 아니면 J 생각을 해야 하나?

아니지, 그냥 올라가자. 그래야 돼. 그래야—



"뭘 그렇게 생각해?"

"헉!"

혼자 걸어가는데, 뒤에서 들린 소리에 너무 놀라 발을 헛디딜 뻔했다.

"뭘 그리 놀래."

"아, 그게....."

내 생각이 형상화된 듯, 바로 뒤에 그 애가 있었다.

"어? 재혁이는?"

"재혁이, 선생님이 데리고 가셨어. 너무 힘들어 하셔서 차로 데려다 주신대."

"그럼 먼저 올라가. 나 지쳐서. 좀 쉬었다 갈래."

"아냐, 같이 가자."

"어?"

"우리 둘이 놀리는 거 재미 붙인 거 같던데."

"아. 재혁이가? 그러면 더 붙어 있으면 안 되잖아."

"거짓말이라고 하면 더 싫어하잖아."

"어? 근데 너랑 나는 사귀는 사이가—"



말이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뒤엣말을 뭘 꺼내야 하는 거야.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 애는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너, 지금 얼굴 빨간 거 뭐 때문이야?"

"힘들어서 그런 거야."

"아닌 거 같은데. 그다음 말 뭐 하려고 했어?"

장난스러운 말투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목이 탔다.

"어, 목 말라서… 목 마르다고."

".......진짜?"

잠깐의 침묵. 나는 그게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물 마시고 갈게. 먼저 가."

"아냐. 물 마셔.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사찰의 약수터에 도착하니 반 아이들이 대부분 와 있었다. 유진이가 물었다.

"너, 잘 했어?"

"어?"

"잘해 보랬잖아."

"뭐를??????"

"와, 나 진짜. 나도 이젠 몰라."

한숨을 푹 내쉬는 유진이가 속삭였다.

"둘이 잘해보라고 했잖아. 둘.이.서."

"나 피하기 급급한데 지금…?"

"나도 이젠 모르겠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

"어… 응."



뭐가 뭔지도 모를 날이었다.

'나도 몰라'는 말이 내 마음에 콕 박힐 만큼.

나는 그날 정말 혼란스러웠다.


누군가 "그 애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자신있게 "응"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애와 사귈 수 있겠냐?"”는 물음에는 '글쎄……'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건 분명했지만, 사귄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J와의 사건 이후, 나는 누군가의 시선조차 두려운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 애의 눈길조차 무서울 때가 있었다.

그 애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그 마음을 꺼내놓기엔—

내 마음은,

아직 너무 작고,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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