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H와 관련된 소동이 있고 난 후였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그 애가 아직은 완전히 마음 닫기를 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H와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일까, 아침 환기 루틴을 서서히 시작했다.
처음에는 7시 30분, 7시 20분, 7시 10분.. 10분씩 줄여가면서 반에 일찍 도착했다.
그리고 나면, 다시 맞기 시작한 아침 바람에 기분이 다시금 좋아졌다.
하지만,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 애는, 그날 이후 누군가와 함께였다.
항상 혼자였던 그 아침은, 이제는 그 애의 친구들과 함께였다.
아무래도 그 전과 같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내 예상대로 되니 불편하기도 하고, 서운해지기도 했다.
나와 그 애 둘 만의 바람맞이는, 우리가 말로 약속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운한건 나 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도 어쩌면-
조금은 서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평소와 같은 질문이었다.
“있잖아. 이거 말인데.”
“-이 정도는 너 혼자 풀 수 있을 수준인데?”
“어, 아니 이 부분이-”
“조금 더 혼자 해보고 나서 가져와줄래? 나도 정리할 부분이 있어.”
“그래.”
아, 나 혼자 할 수 있을 것을 아는구나.
대단하다. 그러면 조금 더 풀어봐야지.
“있잖아, 혼자 해봤는데 막혀서-”
“좀 더 하면 할 수 있는데?”
“너 지금, 왜 그래?”
“뭐가?”
아까부터, 나한테 말하는 게 좀.
아니, 조금이 아니었다.
사실, 그 애가 나를 거부하는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상처에 소독약을 떨어뜨린 것 마냥 따갑고 화끈거리는 기분.
내 착각일까 생각했던 그 마음이-
그 애와 눈이 마주친 순간 또렷이 새겨졌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애의 눈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구나.
“아니야. 나 이제 풀이법 알게 된 거 같아. 돌아갈게.”
“너, 잠깐만.”
붙잡으려는 그 애의 손을 피해, 자리로 돌아갔다.
문제집을 내려놓고, 풀이 과정을 살피는 척 하며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나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 애의 태도를 눈치챘다는 걸, 다른 아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거부당했다.
질문도, 말도, 그 애를 향한 감정도 전부 거절당한 것 같았다.
그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나는 그날, 눈에 잡히는 문제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과학 문제마저도, 그냥 멍하니 보고 두 세 문제를 풀다 말았다.
나, 대체 뭐한 거지?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 애가 나를 거부하는 것도 모르고, 나는 그동안 혼자 설렜구나.
진짜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감쌌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의 온도가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아. 정말. 나 진짜.. 자의식 과잉이구나.
J가 말했던 말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너, 잘난 척 하지 마. 재수없어."
설마, 그 말이 맞았을까.
그 말처럼 내가 그렇게 보였던 걸까.
학교에 있는 동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내 이상함을 감지한 건, H였다.
학원 수업에서 과학 시간을 지난 쉬는 시간이었다.
“너 왜 그래? 오늘 좀 이상하다?”
“어. 어...”
“너 어디 아프냐?”
차가운 손. H는 다한증이 있어서, 가을이 되면 손이 차가웠다.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손이 이마를 만지는데도 정신이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열은 없는데. 너 진짜 어디 아파? 배라도 아프냐?”
“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좀 힘든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이길래 과학시간 집중을 잘하는 애가 이래.”
“.......”
무슨 일인지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내가 질문했다가 거절당한 걸 말할까, 자의식 과잉이었던 걸 깨달은 걸 말할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까, H가 손을 뻗어서 어깨를 툭툭 쳤다.
“힘내. 말 못 할 일, 있을 수야 있는데. 이렇게 티나면 걱정되잖아.”
“.... 고마워.”
다음 날 아침은, 정말 시작부터 말썽이었다.
밤새 배가 계속 싸하게 아파서 잠을 잘 못 잤는데, 생리가 시작되는 전조였다.
생리 첫날은 꽤 심한 생리통이기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걸었다.
그러다 보니, 평소보다 조금 늦은 7시 26분에 도착했다.
“으....”
뜨끔뜨끔 아픈 배를 끌어안고 교실로 들어가는데, 분명 아무도 없어야 했다.
가을이 되면서 나보다 일찍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무도 없을 교실에, 그 애가 앉아 있었다.
“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낸 모양이다.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짧게 인사한 그 애가 다시 교과서를 정돈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 평소의 그 루틴이구나.
아파서 식은땀이 좀 났지만, 나는 그 애의 루틴에 방해되지 않게 문을 조심히 열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바람을 마시니, 그나마 아픈 게 괜찮아졌다.
“후-”
그 애와 교실에 있는 상황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뒷문으로 조용히 나와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걸상 끌리는 소리가 났다.
다른 반이겠거니 하고 신경을 쓰지 않고, 교복 재킷 주머니에 넣어놨던 MP3를 켰다.
멜로디가 막 흘러나오려는데, 인기척이 바로 뒤에서 들렸다.
뭐지, 하고 뒤돌아보니 그 애가 뒤에 서 있었다.
“너 바람 쐬길래. 나도 쐬려고.”
“아. 그럼 나 들어갈게. 편하게 해.”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그 애가 말했다.
“어제, 그건-”
“아, 그 문제. 괜찮았어. 집에 가서 풀어봤거든. 풀이랑 해설이랑 맞더라.”
뭐든 아무거나 말하고 봐야 했다.
난 너무 부끄러웠고,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하하, 얼마나 됐다고 좀 춥네. 이제 들어간다. 넌 더 쐬고 와.”
“야.”
정색하는 그 애를 보면서, 나는 그 뒤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나, 이제 들어가서 좀 쉴게, 오늘 몸이 좀 안 좋아.”
“......”
“들어간다.”
며칠 동안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였을까?
시작된 생리통은 지독하리 만큼 아팠다.
결국 마지막 CA 시간에는 운동장에 나갔어도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H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겠다고 약속했으니 운동장에 나오기는 나왔는데, 자꾸 추웠다.
아픈 만큼 얼굴 안색이 안 좋았는지, H가 말했다.
“너 그렇게 아파?”
“응.. 좀 아프기는 해.”
“춥진 않고?”
“아.. 춥긴 한데. 괜찮아.”
“그럼 여기 앉아 있어. 우리 얘기나 좀 하자.”
“그래.”
운동장 스탠드 옆에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스탠드 근처로 공이 하나 굴러왔다.
축구를 선택한 아이들의 공이었다.
발치로 굴러온 공에 차 줘야 하나 싶어서 공을 차려고 일어서는데, 누군가가 외쳤다.
“공 좀 차 줄래?”
아침에 피한, 그 애였다.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의 그 애.
나는 그 담담한 얼굴을 낯설게 바라봤다. 매일 봐 온 얼굴이었는데도 낯설어서.
어떻게 해야 하지, 공을 던질까, 차줄까. 망설이는 나를 보면서 그 애가 한마디를 했다.
“공, 못 차?”
“어, 아니..”
“공도 못 찰 것 같은 컨디션인데 운동장에 왜 나와. 질투나게.”
“응?”
“다음부턴 운동장 나오지 마.”
누구에게도 명령조로 이야기를 하는 애가 아니었는데.
나한테 왜 저러지?
평소엔 늘 조용했고, 부탁할 때조차 조심스러웠던 애였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이건, 그 애답지 않았다.
처음 듣는 누구, 이를테면 H에겐 농담같은 말로 들렸을 지 모르는 말이었다.
그 말은 꼭 차가운 비수처럼 내 마음을 할퀴었다.
“어?”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아, 생리통 때문일까.
계속 아파서 서러웠던 마음이 터진 것 같았다.
눈물을 흘러서, 정면에서 본 그 애의 표정이 안 보였다.
왜 이러지? 나 왜 이러는 거야.
눈물을 계속 닦았다.
모래가 손에 묻은 것처럼, 눈물을 훔칠 때마다 쓰리고 따가웠다.
“너 왜 울어?”
H가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파서 그런 거 같아.
내가 우는 게 한두 번이야? 늘 그렇지 뭐.”
H에게 대답하다, 문득 그 애를 봤다.
표정이, 잘 안보였다.
그 애 표정을 봐야 해서, 다시 눈물을 훔치는데 그 애가 다가왔다.
“울지 마. 상처받을 줄은 몰랐어. 내가 미안해.”
어깨를 툭툭 치며, 그 애는 공을 가지고 자기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그 순간까지 그 애의 표정을 못 봤다.
“그만 울어도 돼.”
“어.. 아니 갑자기 터지니까 조절이 안 된다, 이거 어쩌지?”
“어쩌긴, 그냥 울어야지. 자, 이거 줄 테니까 덮고 울어. 나 여자 울린 남자 된 거 책임져라?”
자기가 입던 재킷을 주길래, 배 위에 덮고 스탠드에 앉았다.
눈물은 계속 H의 재킷에 굴러 떨어졌다.
나는, 그날 까지 그 애의 다정함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ㅡ
그날만큼은,
H의 재킷이 더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