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우리가 말하지 못한 것들

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by Rachel

8. 마주치는 시선, 그 공포감



읽기 전에 안내드릴게요.
이 글에는 제가 중학생 시절 겪은 신체적 폭력과 정신적 상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의 언어와 감정을 그대로 담다 보니,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를,
그리고 그 시간을 기억하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전해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의 기억은 흐릿하게 겹쳐 있다.

눈물과 분노, 수치심과 후회가 한 덩어리가 되어

하루였는지, 이틀이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아마도, 너무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터진 날이었으니까.


정확히 그날이었는지,

그 다음날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몸이 떨렸던 날,

마음까지 휩쓸리던 그 하루들이 뒤섞여서.

J와 싸운 날,

그리고 다시 그 애에게 머리채를 잡힌 날.
그 사이엔 눈물과 한숨과, 그리고 어딘가로 향하던 나의 발걸음이 있었다.


학원을 갔는지,

집을 먼저 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어디에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는 거다.



수업이 끝난 과학실에서 J와 다시 마주했다.

“너, 이거 물어내. 내 안경알 없어졌어.”

“그게 왜 내 책임이야?”
“니가 날 때렸잖아. 그래서 안경알이 없어졌으니까 니가 책임져야지.”
“아니, 난 책임 안져! 우리 엄마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니 물건 니가 책임져!”

책임을 회피하며 도망치듯 가는 J. 그 뒷모습에, 나는 한숨이 나왔다.


이미 끝난 싸움인데도, 마음은 전혀 끝나지 않는 것 같아서.




J와의 사건이 끝난 직후, 나는 어디를 갈지를 몰랐다.
어떻게 집을 가야 할지, 아니면 학원을 가야 할지.


집은, 나를 반겨 주는 장소가 아니었다.

학교도, 학원도, 그 어디도 나를 지켜주는 곳은 아니었다.


잠시간은 안경알을 핑계로 학교에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안경알을 찾을 수 없었다.

아, 어떻게 하지. 고민스러웠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가 이런 느낌일까?

숨 막히는 공기라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잘 걸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서, 학원에 도착했다.

너무 무거운 발이었다.


애써 선생님과 인사하고, 수업을 듣고, 집에 도착했다.

그날 집에서는, 예상대로 혼이 났다.

안경알을 잃어버렸다는 이유였다.

왜 맞았느냐, 왜 싸웠느냐는 묻지 않았다.


혼나고 나니 진이 빠졌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시럽처럼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자려고 누워도, 늪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잠이 들려고 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그렇게, 밤은 깊어 새벽이 오곤 했다.




며칠을 그렇게 버텼을까. 선생님의 부름으로 J가 교무실에 다녀왔다.


갑자기- 내 책상을 J가 밀었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내 책상에 있던 물건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뭐야. 왜 이래.”

“내가 니년 때문에 전학을 가게 됐어! 니년 때문에!”
험한 인상, 그리고 또 날아드는 손바닥.

잠을 잘 자지 못했기 때문인지 반응이 늦었다.

아, 볼에 다시 화끈한 느낌.



짝-

나를 때려놓고 의기양양한 J의 표정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억울함이 치솟았다.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억울함이, 소리를 만들었다.


“대체 왜 이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니년이 일렀잖아! 그래서 내가, 전학 간다고!”

J는 이성을 잃은 것처럼 악을 썼다. 악다구니를 쓰는 게 익숙한 일곱 살처럼.

나는 뜬금없는 전학 얘기에 인상을 썼다.

“그래서, 니 전학 얘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니가 일러서, 내가 전학 간다고!”

“내가 뭘 일러? 일를 사람이 누가 있는데?”

“니년 말고 나랑 말썽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 너지! 너야!!!”
똑같은 얘기가 한바퀴를 돌았다. 그러자 악에 받친 J는 며칠 전 잡지 못했던 머리채를 다시 잡으려 들었다.

그걸 본 나는 본능적으로 방어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소란을 듣고 구경 온 옆반 애들 중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여기서 또 엄한 사람 잡냐!”

“넌 또 뭐야!”

“니가 우리집에 전화해서 욕했잖아. 우리 아빠가 그거 듣고 화나서 교장 선생님께 니 얘기 하셔서 그런 거야. 너 몰라? 우리 아빠 이사장이신 거?”

“N, 니년 짓이라고?”

“너 지금 상황 파악 못해? 지금 니가 욕해서 전학 가는 거야. 니가 한 짓 때문에.”

“니년 때문이라고?”

“년년 거리지 마. 이것도 아빠한테 알릴 거야. 너, 내일부터 학교 못 나와.”

“이년이!”

옆반 N과 싸우면서 J는 그 자리를 떠났다.

이리저리 흩어진 학용품과 교과서, 노트들을 치우는 건 내 몫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J는 회피하는 데 선수였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날렵하게 피하지 못했고 제대로 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내게 가장 무서웠던 건 시선이었다.

그 애가 나에게 달려들던 그 순간보다,

가만히 지켜보는 그 시선.

그저 가만히, 재밌게 지켜보는 그 눈빛들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J가 과학실에서 내게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지.

“넌 맞아도 싼 년이야.”
그 말이, 내 귀에 속삭이듯 울렸다.

뺨을 맞고, 주변을 무심코 돌아봤지만

그 순간의 얼굴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오히려 몇 마디 말 뿐이었다.
“야! 싸움났어!”

“어디? 재밌겠다!”

“대박이네!”
마치 장난처럼, 아주 천진난만한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이 내게 남긴 상처는, J의 말보다 더 깊었다.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나를 향해 쏟아졌던 욕설과 시선,

감정들이 순식간에 다른 ‘사냥감’을 향해 돌려지는 것.
그것을 봤을 때, J에게 나는 사람조차 아니었구나.

그저, 화풀이를 위한 한순간의 표적이었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모멸감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윤영이가 “괜찮아?”라고 조심스레 말해줄 때까지,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날은, 정말로. 내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오후였다.

내가 맞서 싸우려면, 누군가의 손길이든, 작은 온기든, 무엇이든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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