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간부(학생회) 캠프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회의에서 스쳐 지나간 얼굴들이라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우리 학교 선배들은 수가 꽤 적어서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기대 반, 걱정 반.
우리 학교 이름이 적힌 버스에 몸을 실으면서, 마음은 자꾸만 앞질러 달렸다.
새벽같이 일어나 이것저것 가방에 쑤셔 넣던 그 순간만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창밖의 하늘은 희끄무레했고, 새벽의 상쾌한 공기가 좋았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바다가 보이는 학교였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작은 분교.
조금만 걸으면 바닷가가 보이는 곳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바람이 많이 부는 곳.
낡은 건물과는 달리 반짝이는 수돗가, 삐걱이는 마룻바닥과 흙먼지 나는 운동장.
그야말로 캠프를 하기엔 최적인 곳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장소지만, 낯선 선배들과 모르는 또래 학생들 사이에서 조금 긴장했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팀을 나누고,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텐트를 쳤다.
나는 우리 학교 1, 2반 여학생들과 다른 학교 여학생들이 섞인 조가 되어 일을 함께 했다.
여학생들은 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남자 선생님들이 텐트 치는 것을 도왔고, 나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팔레트를 옮기거나 자잘한 일을 맡았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많지 않았지만, 도움이 되고싶다는 마음 하나로 움직였다. 구슬땀이 흘러서, 고개를 들어 땀을 훔쳤다. 그때, 바로 옆 텐트에서 일하는 남자아이들 사이에, 그 애가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텐트를 치고 나서 주어진 짧은 휴식 시간. 서로 자기소개를 했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C학교, 2학년 3반, 부반장이에요."
내 이름과 반을 말한 뒤에 덧붙인 건 하나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줘요. 뭐든 할 수 있게 노력할게요."
낯설었지만, 누군가에게라도 필요해지고 싶었다.
캠프 활동은 대부분 협동 게임이었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조별로 경쟁하는 방식이었고, 학생들은 점점 웃고 떠들며 경계심을 풀어갔다.
옆 텐트 아이들 틈에서, 그 애는 리더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정리하고, 자세히 설명하고, 다른 아이들의 의견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모습.
그 모습에 나는 괜히, 뿌듯했다.
나는 자꾸만 그 쪽을 바라보다, 하늘을 보거나 땅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협동 게임이 끝나고, 저녁 식사 준비가 시작됐다.
점수가 높은 조부터 식재료를 받았고, 우리 조는 가장 마지막 차례였다.
선생님께 쌀을 받아 든 나는 밥을 지으려고 수돗가로 향했다.
차가운 물에 쌀을 씻는 동안, 그 애와 같은 조였던 남자아이가 다가왔다.
"안녕."
"응, 안녕. 넌 어디 학교야?"
"C학교. 넌?"
"난 L학교야."
"부반장이지?"
"어, 어떻게 알았어?"
"우리 텐트에 너희 반 대의원이 있어. 그 애랑 친구야."
짧은 대화. 나는 친구라고 할 사람은 없다고, 같이 온 건 같은 반 친구들뿐이라고 말했고, 그 아이는 웃으며 돌아갔다. 나는 우리 텐트로 돌아가, 버너 위에 쌀을 올려놓고 밥이 되기를 기다렸다.
아까부터 흐렸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빗방울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소리에 다음 활동을 걱정하던 찰나, 방송이 울렸다.
“우천 관계로 오늘은 더 이상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날의 일정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었고, 나는 문득 그 무리에 낄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도 막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는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밥을 지켜볼 테니 다들 편하게 쉬라고 말하고, 텐트 밖 비를 피할 수 있는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비바람이 흙을 튀기고, 버너 위로 날아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버너를 옮기고, 몸으로 냄비를 감싸며 바람을 막았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 퍼져 나오는 구수한 냄새.
그 소리와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집보다, 학교보다 편안한 감정. 이래서 다들 캠프를 좋아하나 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가 끝나니 밤이 깊었다.
어둠이 깔리는 텐트 안에서, 보온병을 꺼내든 누군가가 들킬까 조심스레 말했다.
"야, 이거 소주야. 한잔 할래?"
우리 텐트 아이들은 둘러앉아 입막음을 위해 한 명씩 보온병의 소주를 한 모금씩 마셨다.
나도 따라 한 모금을 마셨지만, 금세 속이 안 좋아졌다.
음악을 듣겠다며 MP3를 귀에 꽂고 누웠지만, 음악은 틀지 않았다. 토할까 무섭고, 들키는 것도 무서웠다.
모두가 잠든 듯, 고요해진 밤. 옆 텐트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승이. 니 진짜냐?"
"와, 그 키 작은 애가 뭐가 그리 좋디? 어리버리하던데?"
"그냥, 좋아."
"낮에 수돗가에서 봤을 때 뭐가 예쁜지도 모르겠던데? 진짜야 너? 난 걔랑 친한 반장이나, 아니면 B가 더 나은 것 같더라."
"네가 걔를 알아? 뭘 알고 말하냐?"
심장이 툭,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 말들이 혹시 나에 대한 걸까. 아니겠지, 하면서도 지울 수 없는 찜찜함.
하지만 그보다 먼저, 걱정이 밀려왔다.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까 봐.
한밤중, 까만 밤이 깔린 운동장을 건너야 하는 학교 건물.
그 안에 화장실이 있어서 나 혼자 가려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고 눈을 감았다.
한참을 눈을 감고 버텼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속은 불편했다.
내 머릿속에는 들켜선 안 될 술과 비밀스러운 속삭임, 그리고 어딘가 불편한 감정들이 엉켜 있었다.
일요일 아침,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딱히 나누는 말도 없이 해산되었고, 캠프는 그렇게 끝났다.
월요일, 학교에 도착했을 때 그 애가 먼저 와 있었다.
“일찍 왔네. 오늘도 늦을 줄 알았는데.”
“그냥… 눈이 일찍 떠져서.”
나는 엎드려 눈을 붙이려 했다.
“다 들었어? 텐트에서, 남자애들 얘기.”
“응. 나 잠 안 잤어. MP3 듣고 있었어.”
“그래. 그거, 진짜야.”
졸려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뭐가?”
“좋아한다는 거.”
나는 웃었다.
“너도 B 좋아하는구나. 잘 됐으면 좋겠다.”
“아니야. B는 아니야.”
나는 뭐가 아니라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다른 사람 좋아해.”
혹시,
나일 수도 있다고
잠깐—
아주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넘겼다.
내가 그 애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그때의 나는 아직 잘 몰랐다.
그날 이후, 나는 유진이와 그 애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캠프에서, 유진이가 그 애를 좋아한다고 말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둘이 같이 있게 만들었다.
학생회 일이 있을 때마다 둘을 같이 보냈고,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건네면서 대화를 하게 해 주었다.
그런 내 행동이 그 애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건 모르고.
어느 날, 그 애가 짧게 말했다.
"이제 그만해. 나 유진이 안 좋아해. 같이 있게 만들지 마."
날선 말을 남긴 채, 그 애는 곧장 교실을 나갔다. 나도 당황해서, 뒤따라 나갔다.
앞문 쪽 창가에 그 애가 기대 있었다.
"바람 맞으러 나온 거야?"
"응. 잠 깨려고."
그 애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어색한 표정을 보고 문득, 그 애가 나를 좋아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후로 아침에 둘만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대신, 나는 수학 문제를 들고 그 애를 찾아갔다.
아이들은 우리를 놀렸고, 우리는 웃으며 넘겼다.
그 시절의 마음은, 그냥 스쳐 지나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