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열 다섯, 우리는 자라고 있었다.
하루가 짧게 느껴질 만큼, 우리는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그만큼 함께 보내는 시간도, 감정도 쑥쑥 자랐다.
그래서일까. 2학기에 치른 기말고사가 좀 빨랐다.
시험은 끝났는데, 학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교실에는 가을 햇살과 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들이쳤고, 배치고사 때문에 다들 날카로워졌다.
팽팽한 긴장 속 하루의 반복. 꼭 얼음 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어떤 아이는 아예 포기한 듯 잠만 자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아이는 중압감에 하루 걸러 하루를 눈물로 사는 아이도 있었다.
우리 반도, 그 애의 반도. 같은 학년의 반 아이들도 모두 꽤나 마음고생을 할 때쯤, 나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배치고사를 준비할 때, 수학 분야의 문제는 내게 어려움을 준 적이 많았다.
나는 아예 배치고사 문제집 중 모르는 것이나 틀린 것을 표시해 그 애에게 들고 갔다.
어느 날은 그 애가 나에게 국어 문제를 묻기도 하고,
내가 사회 문제에 대해 토의도 할 정도로,
우리는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짧게 서로의 근황에 꿈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어. 그래서 돈을 아주 많이 벌고 싶어.”
그 애의 현실적인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허준 위인전 읽고 대단한 사람이라 의사가 되고 싶었었어. 그런데, 의사가 되려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알고 나니까 꿈이 없어지더라. 그래서 나는,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꿈이 있고, 그 꿈을 향해 걷고 있잖아. 나는 꿈을 향해 걷는 너를 응원할게.”
그 말에, 그 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의사가 되어야겠네.”
“응? 아니 부담 갖지 말고. 나는 널 응원한다고.”
“뭐야, 부담 주는 거야?”
“아니야! 그냥 진심으로 응원한다니까, 진짜로!”
당황해 대답하는 나를 보며, 그 애는 웃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횡설수설 하는 게 그 애에겐 재미있는 일이었던 것 같다.
가을의 끝, 11월 중순의 배치고사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그 애의 반 분위기가 아슬아슬해지는 게 느껴질 정도로 험악해지고 있었다.
그건, 우리 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그 반이 교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곤 했다.
필요한 질문만, 딱 그것만 하고 돌아갈 때가 많았다.
언제든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된 기분이어서.
배치고사 압박이 점점 심해질수록 나는 정말 필요한 질문 외에는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압박감이 심해서, 혹시라도 그 애에게 짜증이나 화를 낼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질문거리가 자꾸 늘고 있었다.
정말 멍청해서 그런 걸까, 이런 것도 질문할 거리가 되는 건가?
가끔 물어보고 막상 알게 되면 다른 데서 막히곤 했다. 내 응용력 부족이 원인이겠지.
시험이 끝났을 때에도, 그 애는 여전히 교실 맨 뒤, 뒷문에 가까운 쪽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의 앞은 늘 재혁이의 자리였다. 나는 그 자리쯤을 늘 밖에서 흘끔흘끔 보곤 했다.
모든 시험이 끝난 뒤, 교실의 분위기는 이루 말할 것 없이 풀어졌다.
수업시간에 잠을 자거나, 만화책을 돌려 읽거나.
아니면 빙고판으로 빙고 하던가, 오목을 하던가.
공책으로 할 수 있는 보드게임이나 책을 읽는 등 수업시간보다는 그동안 못했던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수업시간을 사용했다.
나는 그 시간에도 여전히 질문을 하고는 했다.
이제는 고1의 선행학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험 수준을 보면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는 예상에서였다.
집합부터 시작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수리력이 모자란지, 전의 그 줄넘기처럼 정말 못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이어지던 어느 날, 그 애에게 물었다.
“지금처럼만 계속되면 좋겠다. 넌, 우리랑 같은 학교 가?”
“아니, 난 다른 학교 가.”
음, 그러면 H고를 가나?
신문에 났던 H고를 생각하면서 물었다.
“그러면, H고 같은 데 가는 거야?”
“아니, 난 누나가 다녔던 학교를 갈거야.”
“어딘데?”
“K고. 거기 좋대.”
“어..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 내가 모르는 학교인가봐.”
“응, 여기랑 떨어져 있어서 잘 모를 수도 있어. 그래도, 누나가 다녔던 곳이라 안심되거든. 거기선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럼 난 여기서 응원할게. 의사 되면 나 모른척 하기 없기다!”
“응원해준다니까 고맙네.”
그 다음부터, 나는 그 애를 조금씩 놀리기 시작했다.
열여섯이 되면, 다시는 그 애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시절 장난처럼 툭툭 내뱉은 말들이, 사실은 마음을 내던진 고백이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나답게 그 애에게 닿고 싶었다.
놀리는 것도, 보는 것도,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감정을 퍼붓듯 장난을 아낌없이 쳤다.
물장난처럼, 내 감정을 흘려내면 조금이라도 덜 아플 거 같아서.
그 애와 나는, 그 해의 2학기를 그렇게 보냈다.
어쩌면, 서로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나의 중학생 시절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내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중학생 시절이 끝났을 뿐- 내 사랑은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