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우리가 말하지 못한 것들

20분보다 더 긴 찰나

by Rachel

15.5 그 겨울의 봄날


그 겨울, 밸런타인데이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배치고사가 끝난 교실은 헐렁했고, 반 친구들은 봄방학을 앞두고 들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 바로 다음 주가 방학이었기 때문에, 그날은 마치 학기 마지막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너, 승이한테 우정 초콜릿 줄 거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늘 하던 대로, 질문하러 그 애에게 갔을 뿐이었는데.
이제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긴 싫었다. 이번엔, 진짜 내 마음을 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 남은 날, 부랴부랴 아몬드랑 초콜릿을 사서 만들어보기로 했다.

서툰 손으로 초콜릿을 만들다 몇 번을 태웠고, 부엌엔 초콜릿 냄새가 가득했다.

엄마는 중탕으로 하라고 조언했지만, 결국 냄비를 태워 내가 다 씻어야 했다.

신생아 주먹만 한 초콜릿 8개를 만들었고, 그중 멀쩡해 보이는 세 개만 포장했다.

하나는 모양이 엉망이라 엄마와 나눠 먹고, 두 개는 아빠와 동생에게.

그리고 마지막 셋은, 그 애에게. 포장한 초콜릿을 가방에 넣고 그 애 반 앞에 섰다.


질문도 해야 했고, 초콜릿도 줘야 했는데 도무지 각이 안 나왔다.
결국 평소처럼 질문을 하러 갔고, 문제집을 넘기며 조심스럽게 초콜릿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

"초콜릿. “

"니가 만든 거야, 지난번처럼 산 거야?“

"…만든 거."

그 애는 작년에 마음이 담긴 초콜릿은 안 받고, 산 것만 받는다고 했었다.
작년엔 그래서 대충 사서 줬었는데, 올해는 꼭 내가 만든 것을 주고 싶었다.
그 애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오, 이 손으로 만든 거야? 애기 손으로?"
"어? 어.."

귀가 붉어지는 걸 느끼며, 나는 도망치듯 말하고 돌아섰다.
"만든 거 안 먹는 거 아는데, 맛없으면 버려야 해."


화장실로 달려가선 얼굴이 빨개졌는지 확인해 보니, 목 끝까지 달아올라 있었다.



밸런타인 초콜릿을 결국 전해줬다는 후련한 마음으로, 혼자 집에 가는 길 어귀에 들어섰다.
mp3를 들으며 둑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리고 곧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맛있더라. 잘 먹을게.]

나는 놀라서 멈춰 섰다.

장난인가 싶었다. 정말 그 애일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반 친구들에게 초콜릿을 주긴 했지만 번호는 알려준 적이 없었다.

문자를 이어갔다.

[맛있게 먹는다니 좋네요. 근데 누구세요?]

[맞춰봐.]

[미안한데, 나한테 번호가 없어서 그래요. 정말 누구세요?]

[나, 승이야.]


그 애였다. 나는 정말 놀랐다.

그 애가 핸드폰이 있는지도 몰랐고, 학교에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물었다.


[어? 진짜 승이 맞아? 내가 번호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응, 맞아. 나, 시끄러워지는 거 싫어서 학교에서 내 폰 꺼낸 적 없어.]
[아.. 그랬구나. 그럼 번호 누가 알아?]

잠시 후 문자가 왔다.

[주머니에서 손 빼고 걸어. 너 그러다 또 넘어져.]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보고 있나 싶어서. 바로 또 문자가 왔다.

[뒤돌아보지 말고 얼른 걸어. 춥겠다.]

나는 실실 웃으며 핸드폰을 꼭 쥐었다.

발열 기능 하나 없는 핸드폰이 그날만큼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안 넘어질게. 근데-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어, Y한테 물어봤어. 걔도 알던데, 네 번호?]

순간 기분이 식었다. 엄마가 Y에게 번호를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써 웃으며 답했다.

[어쨌든 이건 너한테만 알려주는 번호야. 너랑 재혁이만 알아.]

[어? 알았어. 그럼 친구들한테 알리지 않을게.]

문자는 계속 이어졌다.


[초콜릿, 먹어본 거야? 언제?]

[마치고 열어봤는데 진짜 꽁꽁 싸매놨던데?]

[맛없으면, 정말로 버려도 돼.]

[아냐. 맛있더라. 아몬드랑, 해바라기 씨랑. 좋은 거 많이 넣었더라.]

[나 손 시려서 이제 핸드폰 넣을게. 문자 보내줘서 고마워.]


그날, 나는 분명 혼자 4km를 걸었다.
문자 주고받은 시간은 15분 남짓이었지만, 그 시간이 그렇게 짧아질 줄은 몰랐다.


그날 이후, 우리는 우리만의 비밀이 하나 더 생겼다.

봄이 오기 전, 그 겨울의 끝자락에서.

그 겨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듯한, 그런 문자를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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