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그 해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났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따라갔을 뿐, 기억나는 장면이 거의 없다.
단 하나, 기억나는 것은 수능이 끝나는 날의 기억.
수능이 끝난 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 애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능 치느라 고생했어. 잘 봤길 바래.]
한시간쯤 지났을까.
따뜻한 방 안에서 졸고 있다가 온 문자였다.
[고마워. 너도 고생했네. 그런데 나 재수해.]
멍했다.
분명 잘 쳤을 텐데, 재수라니 무슨 일이 있나.
떨리는 마음으로 문자를 몇번이고 확인했다.
다시 확인해도, 그 애의 문자가 맞았다.
내가 잘못 보냈나?
아니, 재수를 왜 하는 거지? 뭔가 망쳤나?
그런데, 보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20분동안 계속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래, 그럼 응원할게. 내년엔 네가 원하는 곳에 꼭 갈 수 있을 거야.]
이 세 문장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은 모른 채.
나는 답이 오지 않는 핸드폰을 계속 붙잡고, 그날 밤을 밤새웠다.
우리 사이의 대화는 멈췄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수능이 끝난 뒤, 나는 운전면허 학원을 다니고, OT를 가고, 기숙사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그 즈음의 하루하루가 이상하게도 너무 길었다.
무언가를 해볼 힘은 없었다.
나는, 그 시간에 머물러서, 그 애가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품고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3월이 되었다.
봄보다 겨울 느낌이 훨씬 더 드는 날, 나는 엄마 아빠와 대학 입학식을 갔다.
이방인 같은 느낌. 나만 유난스러운 사람이 된 것 같았고, 세상에서 좀 더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때도, 가끔씩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던 것 같다.
괜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누군가의 연락을 계속 기다리고만 있었다.
나는 대학을 가면서 몇몇 번호들을 정리했지만, 그 애의 번호를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애의 번호는 이름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고, 나는 중간에 바뀐 번호로 연락을 했었기에 그 애도 나도 서로의 연락처를 분명 알고 있었다.
기숙사에서, 나는 이유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밤들이 있었다.
스마트폰이 아니라 3g 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전화를 기다렸다.
괜히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날들.
그 때는 몰랐었는데, 나는 그 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그게, 그 밤마다 울었던 이유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애가 다시 연락하지 않을 거란 걸 어렴풋하게 눈치챘다.
그런데도 나는, 그 애의 이름을 지우지 못했다.
그 애의 번호를 옮겨 담았고, 그 애의 사진을 기숙사에 가져 와서 가끔 챙겨보았고,
그 애를 기다리며- 스무 살을 시작했다.
낯선 기숙사, 낯선 도시.
아무런 뿌리도 없는 곳에 스스로를 던졌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버려진 기분’에 가까운 무력감을 느끼곤 했다.
내가 선택했음에도, 이유 없는 무력감과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감각 속에서
나는 룸메이트가 잠든 자정을 기다렸다.
자정이 되든, 룸메이트가 잠든 시간이면 나 혼자 일어나 학생 휴게실이나 세탁실을 찾았다.
유령처럼 배회하면, 내 존재감이 옅어지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과 공간, 그 속에서야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그런 고요함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었고, 겉으로 보기에 스무 살의 나는 충분히 괜찮아 보였다.
그런데 곁에 있는 사람들 모르게, 나는 아주 천천히, 조용히 비어가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웃는 순간도 있었지만, 기대할 연락은 없었다.
오지 않는 메시지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홀로 깨어 있던 밤들.
잊히는 것과 잊는 것 사이에서, 나는 서툰 혼잣말만 자꾸 반복했다.
어느새 나의 하루는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조차도 나를 점점 잃어가던 그때.
기숙사를 나와 친구와 살면서도, 나는 나를 믿을 수가 없어졌다.
세상을 사는 내가 뻔뻔스럽게 느껴지고, 사는 것조차 죄스러워졌던 나날들.
그래서 더는 살 수 없다고, 아빠에게 용기를 쥐어짜 말했던 그날.
갑작스럽게, 나의 거취가 정해졌다.
그게, 나조차 몰랐던 작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