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우리가 말하지 못한 것들

잊은 줄 알았던 너를, 다시 꺼내어 봅니다.

by Rachel

16. 열 여섯, 바다비가 내리는 사막


그 애와 함께했던 열 셋과 열 넷의 날들.

그리고 함께지만 멀었던 열 다섯의 나는 이제 열여섯이 되었다.

열여섯의 나는, 사막 같았다.

그 애와의 문자는 겨울방학이 지나도록 이어졌다.



말라붙어가는 마음 위로, 그 애의 문자가 물처럼 한 방울씩 떨어졌다.

감성이 한 방울씩 말라붙어가는 말랑한 감정의 결이, 수분을 잃은 듯 딱딱해졌다.

그 애의 문자 한 통에 숨을 쉬고, 답장이 없으면 숨이 막히던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럴수록, 나는 그 애의 문자에 골몰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분명 답이 올 거라고.

열심히 공부하던 날, 벼락같이 깨달은 것 하나.


마른 땅은, 뜨거운 햇살에 금이 간다는 것-

초등학생 때 봤던 진흙 구덩이가 생각났다. 그건 마르면서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 진흙 구덩이처럼- 내 감성도, 내 감정도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계속 기다렸고, 그 애는 ‘나쁘지 않은 무언가’로 답을 했을 뿐이었다.

그 애는 나를 좋아하는 걸까, 그냥 친절을 베풀었던 걸까.

말라붙어가는 감성 위로 내리는 봄비와 같은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감정은 말라붙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감성이, 내 스스로를 사랑해주길 원했었다.



우리 사이엔 분명 사랑 같은 무언가가 뚝뚝 흘러넘치고 있었는데.

왜 나는 점점 말라가는 걸까.

그래도 그 애의 말 한 줄이, 아주 잠깐, 아주 조용한 한마디가 나를 살게 했는데.

왜 그런 걸까.

아주 조용히 스며들었던 그 애의 문장들이, 내 마음의 결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었던 걸, 이제야 깨달았을 무렵이었다.


나는- 가슴에 구멍이 났던 것 같다.

매일, 매 순간마다 살고 싶지 않았던 그 때,

내 마음이 사막이라는 걸 깨닫기 전.


내 마음 속 풍경에는 너라는 비가 내렸다.

마실 수 있는 물이 아닌, 바다비가.

그 바다비는 사막에 뿌리를 내려, 내 눈물을 먹고 자란 소금꽃이 되었다.

그 소금꽃이 내 사막에 가득 필 때쯤, 너는 내게 말했었다.


내가 시렸던 만큼, 너도 시렸을까.

열일곱이 되기 며칠 전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방해일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나봐.

너의 그 마지막 문자, 아직도 기억나.


[서랍 속에 넣어둔 핸드폰이 자꾸 울려서 방해가 돼.]
상처받지 않도록 돌리고 돌린 말.

그애가 나에게 보낸, 답이 정해진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그래, 우리 노력해서 서울에서 만나자.]

라는 그 말을 끝으로 연락을 끊었다.



그 이후 나는 더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죄책감은 해일이 되어 나를 삼켰고, 나는 그 바다에서 빠져서 잠겨들고 있었다.



다행히 내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희야, 지나, 빛나, 써니.

그 네 명 덕분에 나는 그 바다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밥이 먹기 싫어서, 밥을 안먹으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자는 척 자존심을 부리면 항상 그 친구들이 나를 급식실로 데려갔다.

지금 생각하면 애들이 화를 낼 법하지만, 그 때는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아니면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감 없는 공기가 되고 싶었다.

아마 그 때도 나는 그 애의 문자를 하릴없이 기다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내 곁에 다가오는 사람을 철저히 쳐냈다.

그게, 나만의 순애였던 모양이다.




남자 좀 만나보라는 친구들에게 대충 누가 좋아졌다고 말을 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그 애의 흔적을 지울 수 있으니까.

그 사람을 좋아하는 척이라도 하면, 잊을 수 있었다.

가슴 뛴다고 최면이라도 걸면, 괜찮았다.



나는 그 때쯤엔 알았던 것 같다.

바다비를 내리는 그 애는, 내 갈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걸.

사막인 내 갈증을 채워줄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그 애의 연락을, 기다렸다.



어느날, 결국 나는 기다림을 포기했다.

기다리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나는, 밤에는 흉포한 늑대가 되었다가, 낮에는 양이 되어 잠을 잤다.

밤에는 깨어서, 살아 있는 걸 느껴보고 싶어 샤프로 손등을 꾹꾹 누르거나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래도 살아는 있네.

아직, 살아 있다-

살이 아프면 마음이 덜 아팠다.

눈에 보이는 상처가 있으면, 내 마음속의 공허함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 아픈 것도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시간을 모래처럼 훑으며 살아내던 시간, H를 오랜만에 만난 그날이었다.

H는, 나를 잘 알았다. 그래서였을까, 우리 집으로 가는 쉼터에 앉아 말했다.

나는 그 쉼터를 그 때까지도 잘 가지 못했다.

J에게 뺨을 맞아 눈물길이던, 그 날의 쉼터여서.


“너 , 앉아 봐.”

“...여기 앉기 싫어.”

“그럼 서라도 있어봐.”

“왜?”

“너, 표정 이상해.”

“....?”

갑자기 뜬금없이 표정이 이상하다니, 웃기는 말이라서 웃으려는데 H가 말했다.

“너 진짜 이상해졌어. 왜 억지로 웃어?”

“뭐?”


화들짝, 하고 놀라는 소리, 그건 내 심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너 요새 진짜 이상해졌어. 너 왜 그렇게 웃어. 너 그렇게 웃는 애 아니었어.”

대답을, 말을 뭘 꺼내야 하지.

“너, 무슨 일 있지.”

“......”

비밀로 해야 해. 누군가 속삭였다.

들키면 안돼. 그러니까- 비밀로 해달라고 말해.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향해, H가 다가왔다.

그 애에게서 한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비밀로 해줘.”

“뭘?”

“니가 안거. 비밀로 해달라고.”

“.....알았어. 대신 조건이 있어.”


눈동자를 마주 비추며 H가 말했다.

“내 앞에서는, 제대로 웃든지, 차라리 울어라. 그게 뭐냐.”



그 말이 구원이었을까?

나는 그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나는 10분 넘게 거기서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집에 가는 거 얼마 안 걸리는 거리에서, 나는 소금꽃을 뱉어내듯 울었다.


눈이 붓든 말든 울었던 것 같다. 내 울타리 안에서, 나를 봐주는 사람이란 어찌나 다정한지.



그렇게 울고 나서야, 나의 첫사랑이 끝났음을, 그 때서야 알았다.

그래도 아직 그 사랑의 흔적이 아주 짙게 남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나는 그렇게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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