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만의 하이볼

(feat.봉자막창_행복한막창기♡)

by Rachel

곤죠왕자와 산적, 그리고 나.
셋이 함께 시댁에 들렀다.


나는 조카들을 챙기고, 산적은 식당 7시 마감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곤죠왕자와 조카들은 어머님께 맡겨두었다.



그렇게—
오랜만의 자유부인이 되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이 없이, 둘이서만 손을 잡고 걸어보는 시간.



“고기? 막창? 뭐 먹을래?”
산적이 먼저 물었다.

“막창!”
나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막창 지난번에 먹지 않았어?”
“아니거든? 나는 친구들이랑 먹은 거고, 산적이랑 먹는 막창은 아직이야.”

“그것도 포함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기름진 거 많이 먹네.”

“암튼 봉자막창 가는 거지? 야호! 나 드디어 봉자막창 간다~~!”

신나서 손을 흔드는 나를 보며,
산적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괜히 더 들떠버렸다.



가게 맞은편 큰 거리에 있는 ‘봉자막창’.
생긴 지 벌써 4년이 넘은,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곤죠왕자가 엄마 껌딱지였기 때문이다.


봉자막창은 아이 의자가 없고, 칸막이도 없는 데다,
아이를 위한 안전장치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고깃집의 경우 숯은 뜨겁고, 불판은 바로 앞에 있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아이를 붙잡아야 하는 환경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막창이나 곱창집은
아이를 데리고 가기엔 위험한 요소가 너무 많았다.

뭣도 모르고 숯불 위에 손을 올리려는 곤죠왕자의 손을
몇 번이나 황급히 잡아챘는지 모른다.



그런 곤죠왕자가 자라 다섯 살이 되고,
내년이면 학교에 갈 나이가 될 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산적과 막창집에 가보지 못했다.

기대감에 들뜬 채,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살짝 외쳤다.

“여러분~ 저 드디어 봉자막창 가요~~!”

지나가던 행인 한 사람이 수상한 눈빛으로 나를 흘끗 바라봤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오랫동안 고대해온 순간이 드디어 코앞이었다.


헤헤, 신나서 가게에 앉은 순간부터
이미 뭔가를 먹고 싶어 입안이 간질거렸다.

포슬포슬, 부드러운 계란찜이 먼저 나와서
호호 불어가며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먹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조용히 보고 있던 산적이 말했다.


“너 많이 배고팠냐? 뜨거울 텐데 되게 잘 먹는다.”

그 말에 괜히 부끄러워져서,
귀까지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음… 배고팠어. 근데 달다구리한 게 딱 땡긴다.
언제 막창 나오지~~?”


딴청을 피우니,
산적은 태블릿을 조작해 메뉴를 훑기 시작했다.

술 탭을 누른 산적은 늘 먹던
좋은데이와 카스를 장바구니에 담고,

나는—
오랜만의 술자리라 그런지
하이볼이 있나 없나를 유심히 살폈다.


“앗! 있다, 하이볼!”

“그래, 이거 시킬까?”

“아니아니! 나 모히또 하이볼 먹고 싶어!”

그리고 곧 테이블에 올라온 하이볼을 보며 나는 잠시 감회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본 산적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집에서 하이볼 자주 마셨잖아? 왜 그래?”

“아니~ 당신이 사주는 하이볼은 5년만이잖아.”


정말 그랬다.

아이를 가진 이후, 나는 술을 거의 입에도 못 댔다.
밤에 푹 잠들어 아이가 없어질까 봐 겁이 났고,
다음날 컨디션이 안 좋아지면 하루 종일 따라다닐 아이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게다가—
결혼 전 후배 K와의 술자리에서
끝내 못 마셨던 그 ‘산토리니 하이볼’이
아직까지도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유리잔 가장자리에서 올라오는 시트러스 향,
조금 얼큰하게 퍼지는 그 맛이
유난히 반가웠다.


나는 홀짝홀짝 마시며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그런 나를 바라보던 산적이 조심스레 물었다.

“행복해? 지금… 힘들지는 않아?”

“에?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냥, 가장의 숙명 같은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내가 황당해 하며 대답했다.

“뭐야, 그게. 나는 일상이 이렇게 편안하니까 좋은데?
이상한 데서 물어보구 그래.”

산적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냥… 네가 하이볼 한잔에 그렇게 행복해하니까. 내가 못해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런 거 없어. 나는 당신이랑, 우리 곤죠왕자랑 잘 살아서 좋아.
그리고 당신이 가장이라서— 그게 제일 좋아.”

“흠… 그럼 더 고생해야겠네.”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

말끝이 겹쳐 웃음으로 넘겼지만, 잔 속 얼음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괜히 더 크게 들렸다.


5년 만의 하이볼은
그런 감회를 조금 더 깊은 맛으로 데려갔다.

내가 알지 못한 순간들마다
우리 산적은 나와 곤죠왕자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가장의 한 잔과 내가 마시는 한 잔이 같은 술이어도

그 무게는, 마시는 사람의 어깨에 따라 전혀 달랐다.

나는 단순히 ‘오늘 기분 좋아서 마시는 술’이었다면,
산적에게는 ‘오늘까지 버티고 살아낸 인생 한 모금’ 같은 것이었을지도.


그래서였을까.

밥과 술을 배부르게 먹는 동안
산적이 조용히 넘기던 술 한 잔 한 잔이
계속 눈에 아려왔다.

그 깊이가—
어쩐지 유난히 짙게 보였다.

내가 몰랐던,

인생의 쓴맛을 전부 비워내듯
천천히, 묵묵히 술을 마시는 산적의 모습이 조금은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더 밝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우리 볶음밥까지 알차게 먹자!
술안주로 볶음밥 최고잖아.”

“그래.”

행복하게 둘이서 볶음밥까지 알차게 먹고 나니
금세 배가 불러왔다.

그렇게 술 한 병과 맥주 두 병을
끝까지 비워낸 산적의 손을 꼭 잡고,
우리는 코인 노래방으로 향했다.


“여보.
나랑 곤죠왕자는 늘 행복해.
우리 집 가장이 당신이어서 그래.
부담 가지라는 말은 아니니까—

우리 오늘 그냥 재미있게 놀자.”

산적은 한 박자 늦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신나게 놀고 집 가자.”


그 말을 듣는데,
둘이서 손을 잡고 걷는 그 밤길이
왠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솔솔 피어오르는 고소한 막창 냄새.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알코올이 조금 오른 얼굴에 스치는 밤바람까지—

그 모든 사이로
우리의 작은 행복이 함께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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