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균열의 시작)
겨울 MT에는 우리 동기 대부분이 참여했다.
군대 가기 전 마지막으로 어디든 함께 가보자며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그때의 숫자는 꽤 줄어 있었다.
여자 동기 일곱 명 중 나·란란·여니를 제외한 모두가 이미 나갔고,
남자 동기 여덟 명 중에서도 동규는 군대에 가 있는 상태였다.
나머지 아이들은 입대 준비 때문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물쭈물하곤 했고,
결국 MT 인원은 자연스레 조정되었다.
그래도, 선배들과 함께 가는 MT라는 사실이 우리를 들뜨게 했다.
조금 비싼 MT였지만 “그래도 재밌겠다”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참여 인원이 꽤 되어, 우리는 스타렉스 두 대에 나눠 타고 길을 나섰다.
그해 겨울 MT는
17대 회장단에서 18대 회장단으로 넘어가는 첫 행사였다.
차 안은 금세 떠들썩해졌다.
다들 신나서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MT가 얼마나 재밌을지 상상하다가
곁눈질로 D 선배를 훔쳐보았다.
항상 자기 기준대로 살고, 말도 행동도 당당한 그 선배는
내게 오래 전부터 ‘멋있다’는 감정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몰래 바라보는 짧은 순간에도, 귀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설렘도 잠시, 나는 차멀미 때문인지 도로롱— 하고 잠들어 버렸다.
눈을 뜨니 어느새 MT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은 여느 시골 마을의 백반집 같은,
정갈하고 소박한 곳이었다.
짐을 풀고 나니 다들 출출하다며 17기 선배들이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TV 프로그램에서 본 게임들을 따라 하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좀비 게임”.
좀비는 눈을 가리고, 사람들은 장애물처럼 서서 좀비를 피해 숨는 방식이었다.
A팀과 B팀으로 나뉘어 좀비가 사람을 찾는 동안,
예상치 못한 광경들이 펼쳐졌다.
15기 선배의 등에 올라가 버틴 18기 여자 선배,
TV장 뒤에 꼭 붙어 숨은 선배,
문틀 위로 올라가 팔·다리로 버티는 선배,
그리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선배까지—
우리는 웃음을 참느라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입술을 꾹 깨물어도 ‘큭큭’ 새어 나오는 웃음은 막을 수 없었다.
좀비가 된 사람들이 벽을 더듬으며 우리를 찾는 그 순간,
부엌에서는 라면의 매콤한 냄새가 퍼졌고,
그 냄새와 웃음이 뒤섞인 채
겨울 MT의 진짜 시작이 찾아왔다.
겨울 MT의 첫 일정은, 감 와인을 만드는 농장의 상자 접기였다.
생각보다 귀한 경험이라 참여해보고 싶었지만,
나는 차멀미 때문에 결국 방 안에서 속을 부여잡은 채 잠들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자, 옆자리에는 이미 상자 접기를 마친 듯한 동기들과 D 선배가 앉아 있었다.
“어…?” 몸을 일으키자
D 선배가 나를 보며 웃었다.
“이제 깼냐? 코 도롱도롱 골던데.”
“아… 네. 조금 나아졌어요. 근데… 뭐 하고 계셨어요?”
“와인 박스 접어주는 아르바이트. 다 끝났어.”
선배는 손에 종이 조각 하나를 툭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너 괜찮아졌으면 밖에 나가 봐. 국궁 하고 있더라.”
“아… 제가 많이 놓쳤네요.”
속이 다 풀린 건 아니었지만, 괜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D 선배가 천천히 말했다.
“뭘 놓쳐. 멀미 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잠시 후, 특유의 담담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중요한 건, 즐기는 거야.
인생은—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D야.”
선배의 말이,
와인 향 대신 겨울 공기처럼 가볍고 선명하게 가슴에 닿았다.
나가 보니, 들판 한쪽에서 국궁 체험이 한창이었다.
활을 당기는 팽팽한 힘,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
그리고 명중할 때마다 울리는 작은 탄성이 바람 사이로 흩어졌다.
나는 그저 서서 구경하고 있을 뿐인데도
가슴이 이상하게 벅차올랐다.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멀리서 동기들의 웃음소리가 날아오고,
내 앞에서는 활을 든 누군가의 모습이 선명하게 빛났다.
아—
이 겨울 들판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
그 단순한 사실이 이상할 만큼 마음 깊은 곳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국궁을 구경하다가 다시 모닥불 쪽으로 돌아갔을 때,
18기 선배 한 명이 홀로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모닥불 위에는 군고구마도 한쪽에서 노란 김을 올리고 있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코끝까지 스며들어
나도 모르게 손이 앞쪽으로 뻗었다.
선배들의 일을 조금이라도 거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맛있는 냄새에 마음이 먼저 움직였던 것도 있었다.
그 순간, 고기를 굽던 선배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야, 너는 하지 마.”
“네?”
“다친다니까. 장갑도 없이 불 가까이 손 내밀면 어떡해.”
“아… 네.”
나는 그제야 멈춰 선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기가 먹고 싶다는 마음에 팔부터 나가 있었던 거였다.
모닥불의 열기가 얼굴을 데우고,
동기들과 선배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스며들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뒤로 빼며
고소한 냄새 속에서 조금 멋쩍게 웃었다.
아직, MT의 1부는 전야제였다.
하지만— 나는 2부에 참여할 수 없었다.
불운한 사고였다.
시냇물을 하나 건너야 했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물이 조금만 튀어도 바로 얼어붙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실제로 모두가 그렇게 조심조심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딱 한 걸음—
얼어버린 돌멩이가 문제였다.
나는 그 위에서 미끄러졌고,
넘어지는 순간 양쪽 팔로 부축해주던 선배들의 손이
내 몸을 잡아준다고 잡아줬지만,
몸의 중심이 이상하게 앞으로 쏠리며
얼굴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아— 하는 짧은 비명도 끝나기 전에
입술 쪽이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앞니가 부러졌다.
찢어진 입술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고,
부러진 조각은 정신없이 오가는 물살 속에서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따뜻했던 모닥불 냄새는 사라지고, 차창 밖으로만 겨울바람이 흘러갔다.
꽤 비싼 MT는, 나의 부상과 함께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그리고 나는 그때 알았어야 했다.
이 겨울의 균열처럼—
내 2010년도 그렇게 금이 가며 끝나버릴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