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봄

(feat.혹독한 2학년 1학기)

by Rachel

앞니가 사라지고, 사라진 앞니를 수선하고 나는 개강을 하고서야 부산에 돌아올 수 있었다.

부산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동안 비워 두었던 우리 집—

룸메이트의 집이 되어버린 공간에 도착하는 일이었다.

내가 없던 동안 혼자 지냈던 룸메이트는, 어색한 듯 웃었다.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오래 떨어져 있었으니, 서로의 생활 리듬이 조금 어긋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 생각이 어긋난 건, 개강 전 학과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우리 집으로 몰려왔을 때였다.
내가 방에 있는데도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며 밥을 먹고, 방 안에서 익숙한 기척을 내는 걸 보니—
이곳은 이미 나 없이 충분히 완성된 공간 같았다.

그 애들이 돌아가고 나자, 룸메이트는 쩔쩔매며 말했다.

“애들… 몇 번 안 왔어.”

“응, 괜찮아. 내 물건 쓴 적 없었잖아.”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작게 말했다.

“……아니, 몇 번 썼어.”

나는 숨을 들이켰다가 조용히 내쉬며 말했다.

“없어진 거 없으면 됐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방 안 공기가 뜨겁게 일렁였다.
내가 없는 동안의 ‘우리 집’은… 사실 나 없이도 잘 돌아갔던 거였구나.


뭔가 서러운 느낌이, 목구멍까지 뜨겁게 차올랐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아. 나… 아침 운동 다녀올게.”

내 목소리는 최대한 평온하게 뉘었지만, 귓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응, 잘 다녀와.”

문을 닫는 순간, 뒤늦게 가라앉지 않는 그 감정이 살에 닿듯 스며들었다.
마치 내가 없는 사이에 이미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이 된 것 같은 이상한 허전함.

그 감정을 그대로 품은 채, 나는 운동화를 신고 아침 운동을 하러 나갔다.

사실, 아침 운동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그건- 아침 루틴이었다.

개강할 때까지는 아침 운동이 없는데도, 나는 부지런히 동아리방과 도서관을 오갔다.

동아리방에 갔다가 도서관을 갔다오기를 반복하며, 열심히 책을 읽어댔다.

아침의 마음에 떠올랐던 허전함을 책으로 채우듯, 역사서를 빌려서 계속 읽어대기만 했다.

그래서, 은근히 나를 피하는 듯한 회장단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1학년 때 친숙했던 것과는 다르게, 2학년의 나에게는 낯선 동아리방이었다.

회장단이 들어앉으면, 일반 회원인 나는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없었다.
옆방인 장비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던 것도 방해였는지, 어느 날은 회장단 선배가 회의 중에 나를 보고 놀랐다.

“너 왜 여기 있냐?”

“회의 중이라면서요. 그래서 여기서 책 읽고 있었는데요.”

“…옆방 소리 다 들리지 않냐?”

“그렇긴 한데,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겠는데요 뭐.”

“그냥, 회장단 회의할 땐 동아리방에 오지 마라.”

“……네.”

나는 그렇게, 낯선 봄을 맞이했다.
나도 모르는, 그들과의 낯선 봄을.




여느 때처럼, 회장단 회의 때문에 동아리 방에서 쫓겨나
동아리 방 밖의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오랜만에 동아리 방에 들른 17기 선배가 나를 발견했다.

“D야, 추운데 왜 밖에 있어?”

“회장단 회의한대서요. 근데 오늘은 도서관도 닫았고, 장비실도 쓰지 말랬고… 그래서 그냥 여기 앉았어요.”

17기 선배의 얼굴에 금세 당혹과 불쾌함이 섞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장비실도 쓰지 말라고 했다고?”

“네… 그러던데요.”

말이 끝나자마자 17기 선배는 문을 벌컥 열었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회장단 선배들의 표정에서 ‘우물쭈물’이라는 단어가 거의 소리처럼 느껴질 만큼 분명했다.

결국 그들은 방을 비우며 나를 힐끔 보았다.
마치 내가 괜히 방해라도 한 사람인 것처럼.


그 시선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또 한 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인이 된 느낌을 삼켰다.


서늘한 감각이, 가슴을 스쳤다.

아.
여기서도… 나 밀려난 건가.

그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흔적은, 가슴 한가운데 얇은 흉터처럼 남았다.



왜지.

왜 그런 걸까.

내가, 나 모르는 새 잘못이라도 했을까.



나는 몇 번이고 기억을 되짚으며,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잘못을 했는지 되뇌었다.

그리고 아주 한참 뒤에서야 알게 된 사실 하나.

그 진실은—
나에게 너무나도 잔인했다.




혹독한 1학기 중반,
기말고사 준비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던 어느 날이었다.

그때 들려온 한 소식은
내 마음의 마지막 지지대를
조용히, 그러나 완전히 부러뜨리기 충분했다.



그 소식은—

며칠 전 밤샘 공부를 하던 그 날과 맞물려 있었다.


복학생인 18기 선배와 함께 수업을 듣던 시기였다.
밤샘 공부를 하고 커피를 마시러 학생회관 베란다로 나갔을 때,
그 선배가 뜬금없이 물었다.


“너 되게 착한 거 같은데… 왜 그랬어?”

“네?”

“뭔지 몰라서 그러는 거면 물어보려고. 네 동기들, 왜 쫓아냈어?”

“…네? 뭐, 뭐를… 쫓, 쫓아내요?”

“니네 여자 동기들, 네가 다 쫓아냈다던데.
그래서 너랑 친한 애 두 명만 남았다고 그러던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대체 누구한테 들었길래 그런 소리가…”

“우리 동기 여자들이 그러더라.
원래는 많았는데 갑자기 줄었다고.
네가 원인이라던데?”

“네? 무슨 소리예요…?
저는 회장 선배 말을 전했던 ‘메신저’였을 뿐이에요.
걔들 전부 자기 사정 있어서 나간 거예요.
왜 제가 그런 것처럼 말하세요?”

“그래? 그럼 왜 그렇게 된 거지?”

“회장 선배 말을 전하고 나서
마치 애들이 ‘나랑 얘기하고 나간 것처럼’ 보였던 거겠죠.
근데 진짜 아니에요. 전혀 아니에요.”

“음… 일단 네 말은 믿어볼게.”

“…‘일단’이라고요?”

“소문이라는 게 그렇잖아.”

“소문이라고—
저를 그렇게 몰아가면 어떻게 해요?
아무도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그런 소문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리고 그걸 퍼뜨리기 전에
당사자들한테 물어보지도 않은 게 어디 있어요…

어쩐지, 사람들이 다 이상하더라니…”



말을 잇지 못한 순간,
울컥— 하고 눈물이 터졌다.
그날 내가 어떻게 다시 책상 앞에 앉았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내 두 번째 가족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



그 생각이 들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몇 분을 울었는지 모르겠다.
엉엉 울고 있는 나를 선배가 달래려 했지만 그건 소용없는 일이었다.

가슴 깊은 곳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정말로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일 이후, 나는 동아리방에 더 자주 들를 수가 없었다.
어디가 ‘내 자리’인지조차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더 잔인한 건—
그날 이후였다.


18기 선배와의 대화를 알기라도 한 듯,
회장단의 태도는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확실하게 변했다.

그 ‘미묘함’이
오히려 더 나를 괴롭혔다.



그들은 갑자기 나를 ‘평범한 사람’처럼 대했다.
보드게임에서 배신자 역을 맡았던 사람을 대하듯 경계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경계하지 않는 선까지만 조심스레 풀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게 더 아팠다.



그동안 나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배신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이었구나.

단지 소문 한 줄로—
나는 겨우 그런 사람 취급을 받는 존재였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들을 따라가려고 애쓰던 내 모습이
참,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그들도 나와 겨우 세 살, 네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어린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스쳤다.


그들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누군가의 편에 서고 싶고,
누군가를 의심함으로써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걸 안다고 해서 상처가 덜 아픈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 감정을 조용히 삼켰다.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지금 내가 기댈 곳은 여기뿐이라고
스스로 다독이면서.



동기들이 돌아오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믿으면서 그 봄을 버텼다.

돌아보면— 그 해의 봄은 유난히 낯설고,
어쩐지 금방 사라져버린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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