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이면 떠오르는

(feat. 그날의 기억)

by Rachel

4학년이 되던 해, 엄마는 맞벌이를 시작했다.

집에 남겨진 시간들은 갑자기 무거워졌고,

그 무게는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흘러왔다.

집에 남겨진 것들은 다 내 몫이었다.


엄마는 종종 진명 오빠를 기준 삼아 나를 비교했다.
집안일 하나 제대로 못 한다며,
밥도 못 하고, 청소도 서툴다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일을 배운 적이 없었다.
세탁기 돌리는 법도, 빨래 널어 말리는 순서도,
청소기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울면서 따라 했고,
조금 익숙해졌다 싶으면
“그 정도도 제대로 못 하냐”며 다시 혼이 났다.

엄마는 내게
“어쩜 이렇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냐”며,
“네 아빠를 쏙 빼닮았다”고 말했다.
그 말은 점점 내 안으로 가라앉아
‘나는 이기적인 사람인가?’라는 오해로 자리 잡았다.



어느 날은 마늘을 까라고 했다.
4학년이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며,
통마늘 열 개를 그릇째 들고 왔다.

손톱 밑이 따갑게 쑤셨지만,
처음 하는 일이라 속도를 낼 수 없었다.


혼자선 잘 안 된다 했더니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과도를 그릇 안에 툭 던졌다.

칼끝이 살갗을 스칠 듯한 순간이 무서워
칼은 못 쓰겠다고 말하자,
엄마는 더 크게 화를 냈다.

“그것도 못 하냐고!
멍청하긴… 칼도 못 쓰면 어떻게 살래?”

작은 다용도실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차가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며
마늘을 끝까지 다 깠다.



가끔은 나에게 아빠의 흉을 봤지만, 정작 힘들게 들렸던 말은
“너는 아빠를 닮아서 싫다”는 말이었다.

안방으로 불러 앉혀 놓고 그 말을 반복할 때면,
나는 존재 자체가 꾸중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 무렵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다.

어떤 날은 엄마가 칼을 꺼내 목에 대고
“이렇게 살면 뭐하냐”고 울부짖었다.

시계가 열 시를 가리키던 밤이었다.
나는 잠이 없던 아이라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동생이 깰까 봐 몸으로 가리고 서 있었고,
식칼이 쾅 하고 싱크대에 떨어지는 소리가
한동안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며칠 뒤,
이번엔 안방에서 와인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안해서 잠을 못 이루던 밤,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라 방문을 열었다.

피처럼 보이는 액체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유리잔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아빠는 술에 취해 울면서
내 방에 있던 라디오에 머리를 박았다.

“그래, 내가 죽으면 되지.”
그 말과 함께 라디오 한쪽이 깨져 나갔다.

말리려 하자 아빠는 베란다로 향해 문을 열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되지 않냐”며
난간에 한쪽 다리를 걸쳤다.

엄마는 멍한 얼굴로 서 있다가
겨우 아빠를 끌어내 거실로 데려왔다.

그 소동에 동생도 놀라 깼다.

한동안 잠을 자지 못했고,
지금도 가끔 검은색 라디오를 보면 그날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 밤의 공기, 깨진 유리 냄새, 난간 위에 걸린 다리.

그 모든 것들은 지금도 ‘추운 날’이 오면 어디선가 조용히 되살아난다.


마치 그날의 기억들이
겨울의 기온으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얼어붙은 기억들은
칼바람이 뺨을 스칠 때면
지금도 흠칫, 하고 나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매거진의 이전글나만 모르는 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