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노스에서 (1)

카르노스(Carnos)

by Rachel

연을 벗어나며 바다는 점점 성질을 바꾸었다.

섬과 섬 사이를 가르는 대해협은 길이라기보다, 숨을 참고 건너야 하는 틈에 가까웠다.


파도는 높지 않았지만 방향이 없었고,

바람은 불지 않으면서도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카르노스는 그런 바다의 한가운데에 놓인 도시였다.


항구를 향해 늘어선 돌로 된 제방은 오래된 상처처럼 검게 닳아 있었고,

배들은 서로를 피해 정박해 있으면서도

어느 것 하나 안심한 얼굴은 아니었다.


순례자들의 무리는 그 틈에 섞여들었다.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이도 있었고,

검을 쥔 손에서 땀이 마르지 않는 이도 있었다.


이안은 갑판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카르노스의 물결은 용을 부르지 않았다.

해룡의 숨결도, 바다의 응답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곳이 첫 번째 관문이라는 것을.


바람 없는 길은,

언제나 카르노스에서 시작된다는 걸.




카르노스 인근에 상단이 도착할 즈음이었다.

불길에 휩싸인, 무언가가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처절한 울부짖음, 무언가 절박한 울음에 이안은 그곳을 바라보았다.

이안의 눈길을 느낀 듯,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달려왔다.

“저, 저게 뭐야!”

“괴, 괴물이다! 괴물이야! 바다 괴물이 나타났어!”

“왜 하필 지금이야! 귀한 손님을 모시고 있는 지금!”

한탄하는 리더를 보며, 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바라봤다.

사람들은 그것을 괴물이라 두려워했으나, 이안은 곧 알았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목소리였다.



이안은 시젠에게 눈짓했다.

사람들을 다른 항구로 대피시키라는 의미였다.

시젠이 소리쳐 사람들을 몰아내는 동안, 이안은 홀로 분노의 권속에게 다가갔다.

권속 카르마는 그녀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불길이 얼굴을 핥았으나, 이안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녀는 차갑고도 단호한 눈으로 권속을 바라보며, 그 이마 위에 손을 얹었다.

치익— 타는 소리와 함께 손이 그슬려갔다.

피부가 타들어가도, 그녀는 오직 집중했다.

우웅— 낮고 깊은 울림이 두 존재 사이에서 번졌다.

분노의 불길이 잦아들며, 항구의 파도도 가라앉았다.


마침내 불이 꺼졌을 때,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작은 권속 하나가 남아 있었다.


찢어진 눈이 귀여운, 아직 어린 아이 같은 권속.

그녀의 손은 검게 그슬려 있었으나, 그녀의 눈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작은 권속은 그녀의 손바닥에서 몸을 떨었다.

찢어진 눈은 아직 분노의 잔향을 품고 있었으나, 이안은 그 안에서 두려움을 보았다.



그 순간, 바다가 갈라지듯 파도가 열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솟구쳤다.

해룡—카르마의 어머니였다.

바다는 아이의 울음을 알아듣고, 아이의 품을 되찾아주었다.

작은 권속은 어미의 비늘에 몸을 비비더니, 빛의 파편이 되어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슬린 손, 그리고 바다에 내뱉은 이안의 한마디였다.


“미안하다.”

그러자 해룡은 몸을 굽어 그녀의 손에 이마를 댔다.

[이안.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야. 아르드.”

[손은 미안하게 됐어.]

“아니야. 분노하는 인간의 감정에 휩쓸려 아이가 그렇게 된 건 내 잘못이지.”

[미안해. 인간은 다친 곳이 나으려면 꽤 오래 걸리잖아.]

“상관없어. 이걸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분노 속에 사는지 알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들의 왕이지. 아르드, 네가 본 이야기들을 들려줘.”

[오백년 동안 단 하루도 변하질 않았네.]

“-나쁘지 않지?”

[그래- 그럼, 기록을 보여주마.]

파도 속에 별빛이 흩어지고, 그 빛은 곧 오래된 노래가 되어 흘러나왔다.

그것은 바다의 기억, 넵튠의 창세기였다.



아르드가 보아온 바다의 기록이 눈앞에 펼쳐졌다.



먼저 들려온 것은 환호성이었다.

검투장의 모래바닥 위에서, 인간은 인간을 찔러 죽였다.


돈을 건 자들은 그 피에 환호했다.

그러나 곧 환호는 식었고, 그들은 권속을 끌어냈다.

쇠사슬에 묶인 권속은, 마도구의 굴레에 매여 울부짖었다.

칼끝에 피가 튀자, 금화가 쏟아졌고,

금화가 쏟아지자, 다시 피가 요구되었다.


돈은 돈을 불렀고,

피는 피를 불렀다.

탐욕은 자신이 만든 굴레를 삼켰다.


마도구가 폭주했을 때, 불길은 검투장을 집어삼켰다.

그 순간, 환호하던 군중의 얼굴은— 자신이 던진 금화와 똑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오백년이 지나도- 탐욕은 끊이지 않는구나.”

씁쓸한 어투로 이안이 말하자, 아르드가 대답했다.
[오백년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짧지만 인간에겐 길지.

신께 망각을 선물받은 것이 인간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 망각을 선물받았다 해도 정도가 있는 거야. 이건 선을 넘은 거지.”

짧게 말하는 이안에게, 시젠이 다가섰다.

다른 이들을 대피시키고도, 해룡과의 대화를 하는 그녀에게 불안감을 느껴서였을까.

불안한 눈빛으로 이안을 보면 시젠이 말했다.

“저어, 해룡님.”

[저 아해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이로군. 오래 전 누군가와 닮았어...]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무슨 일이지, 시젠?”

“그 권속은 어디로 갔나요?”

[아해야. 나를 보면 인사를 해야지.]

부드럽게 흔들리는 아르드의 비늘을 보며, 시젠이 겁먹은 눈으로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시입니까, 해룡님.”

[이 아해에게도, 기억을 보여줘야 하나?]

“-네가 원한다면.”

그러자, 아르드는 몸을 굽어 자신의 기억을 시젠에게 불어넣었다.

처음에 멍해 있던 시젠은 기억을 보며 점차 얼굴이 굳어갔다.


…시젠의 눈앞에 흘러들던 기억이 서서히 흩어졌다.

금화의 잔향, 불길의 환영, 탐욕으로 일그러진 군중의 얼굴은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바다의 숨결뿐이었다.

시젠은, 이 기억이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이, 이게.”

더듬거리는 시젠의 말을 들은 이안은 한숨을 푹 쉬며 시젠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짧은 금빛 머리카락이 햇빛에 흩날리며, 순간 황금빛 파도처럼 번져갔다.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문득, 그 속에서 시젠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만큼 길었던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올리던 습관.

가꾸지 않아도 좋다며, 오히려 자신과 닮았다며 웃던 얼굴.

그 소박한 말이, 그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가슴이 저밀 만큼 그리운 그 순간이—

황금빛의 겹침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러나, 지금은 기억읽기에 앞서-

도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시간.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마음을 추스른 이안이 시젠에게 말했다.


“-여기가, 분노의 도시라 불리는 카르노스다. 도착한 소감이 어때, 시젠?”

이안의 뒤로 펄럭이는 붉은 깃발-

주홍과 빨강이 뒤섞인 붉은 깃발에 선명히 새겨진 불꽃과 검을 보며, 시젠이 대답했다.

“분노의 도시라는 이름은, 이안님이 붙이신 건가요?”

“아니- 해룡들이 부르는 말이야.

인간은 카르노스라고 부르기만 하지, 분노의 도시라고는 부르지 않아.

하지만- 내겐 분노의 도시라고 부를 만해.

이 땅에 새겨진 기억은 분노 외에는 없으니까.

아르드가 나타난 것도 뭔가 있어서일 테고.”


[그래. 나는 인간의 도시를 감시하기만 하지-

하지만 뭔가 있어. 권속들이 계속 분노하는 사건이 생기고 있다, 이안.

나는 도시 주변의 권속들에게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라 이야기했지만 그 이상의 영향력은 어렵다.

분노에 사로잡힌 권속들이 폭주하는 통에 나 역시 내 힘을 통제하기가 힘이 든다네.]

“그럼 아르드. 내가 직접 무슨 일인지 확인하지. 혹시 너의 권속도 저 안에 있나?”

[나의 권속은 오래 전, 그대가 잠들기 전에 사라진 것을 알지 않나.]

“-미리암의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 도와주지 못했던 걸.”

[그런 과거를 자네에게 묻고 싶은 건 아니었네. 미리암이라- 그리운 이름이로군.]

“그럼 바로 들어갈게. 서두르는게 좋을 것 같아.”

[당신의 길에 어머니의 사랑이 깃들기를, 이안.]

“당신의 길에 어머니의 심연이 깃들기를, 아르드.”

오래 전의 인사법을 나눈 둘은, 둘로 갈라졌다.

아르드는 바닷속으로, 이안은 도시의 중심부로.


얼떨떨하게 두 존재의 만남과 이별을 지켜본 시젠은 저도 모르게 인사를 중얼거렸다.


“당신의 길에, 어머니의 심연과 사랑이 깃들기를.”


그리고 그 인사를 들은 아르드의 눈이 잠시 시젠에게 멈췄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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