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노스(Carnos)
붉은 파도가 몰아치고, 이안은 그 속에서 눈을 떴다.
“미리암?”
조심스레 부르자, 파도 속에서 한 형체가 떠올랐다.
그녀였다. 이안이 기억하는 미리암의 얼굴, 그대로였다.
“왜 여기에 있어? 이제는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 수 있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어요. 아르드 님의 슬픔이, 나를 붙잡았거든요.]
“아르드는 그대가 자유롭기를 바랐어. 그런데 왜 이곳에 매여 있는 거지? 이 사슬은…?”
[제가 소멸된 뒤, 사람들은 더 많은 권속을 원했어요.
검투장에 불려나간 수많은 권속들의 피가, 제 영혼을 사슬처럼 묶어 버렸죠.
저는 계속 그 피를 마셔야 했어요. 그러니… 제발 풀어 주세요.
이 분노의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미리암…”
그러나 이름을 부른 순간, 얼굴이 일렁였다.
파도 속 모래처럼 흩어졌다가 합쳐지며, 낯선 실루엣으로 변했다.
피눈물을 흘리는 권속의 형체였다.
[저주한다! 저주해!
인간들의 오락거리가 된 나를!
나는 해룡의 권속이야, 왜 이리 짓밟히는가!
풀어 줘! 풀어 달라!
이 사슬을 끊어 달라!]
그 외침은 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미리암의 음성, 권속들의 울부짖음, 군중의 환호가 한꺼번에 겹쳐진 분노의 합창이었다.
심연이 흔들리며, 파도조차 울부짖는 듯했다.
이안이 손을 내밀자, 붉은 사슬이 바지직거리며 그녀의 살을 태웠다.
왼손이 타들어가고, 이어 오른손까지 검게 그슬렸다.
불멸의 힘이 손목에서 빛을 뿜어내며 살을 다시 봉합했지만, 고통은 결코 줄지 않았다.
회복과 파괴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손끝마다 불꽃이 피었다 꺼졌다.
그럼에도 이안은 사슬을 놓지 않았다.
숨이 가빠지고, 눈이 흔들려도, 그녀는 손을 더 깊이 파도 속에 밀어넣었다.
핏빛 사슬은 마침내 삐걱이며 갈라졌다.
가루처럼 부서져 나가며, 미리암의 신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사슬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옭아맨 쇠사슬은 별빛처럼 무수히 이어져 있었다.
첫 사슬을 부수는 데, 한 생애가 다 흐른 듯 길고도 길었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다시 손을 얹었다.
“좋아. 그럼, 하나하나 끝까지 부숴주마.”
그리고 이안은 하나하나 부숴 나갔다.
끝이 없을 사슬을 하나씩.
이안이 사슬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남겨진 칼스는 바닥을 파헤쳤다.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는 없는 법이야. 그렇다면 바닥이지!”
“그런 말이 어디-”
시젠이 왈칵 성을 내려 할 때였다.
캉, 하고 칼스의 삽 끝에 무언가 걸렸다.
그러자 시젠은 기민하게 움직여, 칼스의 삽을 올리고 손끝으로 섬세하게 땅을 파 내려갔다.
그리고 그 끝에는-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의, ‘미리암’으로 보이는 사체가 있었다.
삽 끝에 걸린 것은 단단한 결계였다.
그녀의 몸은 투명한 막 속에서 유영하듯 떠 있었다.
마치 깊은 바다 속을 떠도는 인어처럼—
숨이 멎었는데도, 그 표정은 고요하고 따뜻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 마지막 모습을 지켜 주려 한 듯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을 멎게 한 것은 결계가 아니었다.
결계를 감싸듯 쓰여진 수많은 문양들.
검은 피로 쓰인 룬어가 허공을 휘감으며 떠다니고 있었다.
휘갈긴 듯 사나운 필체.
분노, 저주, 원망이 한꺼번에 얽힌 글자였다.
“……룬이 살아 있어요.”
시젠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룬 하나가 미약하게 깜박이며 붉게 타올랐다.
그 불빛이 미리암의 얼굴을 스치자,
마치 그녀가 숨을 쉬는 듯,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누가 이런 짓을—”
“미리암 님을 추앙하는 시민이라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아.
누가 감히, 해룡의 권속을 이런 식으로—!”
칼스가 이를 갈며 삽을 움켜쥔 순간,
공기가 일그러졌다.
바닥에 새겨진 룬어들이 하나둘 깜박이며 붉게 타올랐다.
불길한 울림이 땅 밑에서 올라왔다.
그때였다.
부드럽고도 섬뜩한 중얼거림이 그들의 귓가를 스쳤다.
“언제나 그렇듯— 욕심은 분노를 낳고, 그 분노는 파멸을 낳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도시를 오래 바라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담겨 있었다.
칼스와 시젠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기둥 뒤, 그림자 하나가 일렁였다.
“누구냐!”
“그 파멸을 인도하는 자입니다.”
그림자는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실루엣이 바닥의 룬과 포개지며, 서서히 피안(彼岸)의 문양이 떠올랐다.
칼스가 삽을 내리쳐 공격했지만—
삽날은 그림자에 닿기도 전에 증발했다.
“그럼, 안녕히.”
그림자가 사라지자, 결계의 표면이 흔들렸다.
피로 쓰인 룬어들이 흩어지며 새 문양으로 바뀌었다.
붉은 빛이 사체를 감싸올랐다.
“물러서!”
시젠이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결계가 터지며 피와 빛이 폭발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없었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칼스가 이를 갈며 삽날을 던질 때, 이공간의 세계에서도 진동이 일었다.
이안이 세 번째 사슬을 부수던 순간이었다.
붉은 파도가 요동치며, 미리암의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이안 님— 붙드세요! 저를, 꼭 붙드세요!]
“무슨 일이야, 미리암?”
[저의 백을 가지고… 누군가가 무언가 하려 합니다.
그쪽으로 끌려가고 있어요!]
“백이라니… 설마, 아직 시신이 남아 있었던 거야?
그대는 화장을 원했잖아.”
[아르드 님이 그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해룡의 권속은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그래서— 남아 있었지요.]
“그럼 지금은 왜—”
[아아— 지금, 끌려가요! 누군가가 나를 불러요!]
파도 속이 찢어지며, 미리암의 몸이 반쯤 뒤틀렸다.
사슬이 뒤로 끌려가며 이안의 팔을 질질 끌어당겼다.
“안 돼, 이건 함정이야!”
이안이 외쳤지만, 이미 손목이 붉게 묶였다.
그때, 현실의 결계가 터지며 빛이 폭발했다.
“크윽!”
저주를 뒤집어쓴 것은 시젠만이 아니었다.
칼스도 저주를 뒤집어써, 처참한 몰골이었다.
다행히 미리암의 몸이 터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몸을 감싸던 결계가 생물처럼 움직여 그들의 몸을 휘감았던 것이었다.
이안은 더 이상 사슬을 끊지 않았다.
타들어간 손을 거두고, 파도 한가운데에 섰다.
“미리암.”
파도 속에서 울음이 잦아들었다.
분노의 합창은 낮아지고, 하나의 숨결만이 남았다.
“나는 왕이지만, 네 주인은 아니다.”
이안의 목소리는 낮았고, 바다는 그 말을 삼켰다.
“네가 이 도시에 남고 싶다면,
그 분노를 끝까지 끌어안고 싶다면—
나는 그 선택을 막지 않겠다.”
붉은 사슬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바다로 돌아오고 싶다면.”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파도 너머, 심연의 방향을 향해.
“아르드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내가 네 길을 열어주마.”
차르르릉, 사슬이 끌리는 소리 외에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사슬 하나가—
이안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서 스스로 갈라졌다.
[……돌아가고 싶어요.]
미리암의 목소리는, 처음으로 분노가 스며든 목소리가 아니었다.
[바다로.]
[어머니의 품으로.]
그러자, 이안이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여기, 왕이 있습니다. 어머니 바다시여, 선택을 한 존재를 보내니, 받아 주소서.]
이안의 말이 끝나자, 파도는 더 이상 붉지 않았다.
분노의 색을 머금고 있던 물결이
천천히 본래의 빛을 되찾아,
짙고 깊은 남색으로 가라앉았다.
미리암의 형체를 옭아매고 있던 사슬은
더 이상 끊어질 필요가 없었다.
그것들은 소리 없이 녹아,
물속으로 스며들었다.
파도가 갈라지며, 심연이 열렸다.
익숙한 숨결이 흘러들었다.
깊고, 오래된 바다의 숨.
[이안.]
아르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선택했다.”
이안은 짧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한다.”
붉은 사슬의 잔해가 파도 속으로 가라앉고,
미리암의 형체는 점점 빛을 잃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이번엔… 붙잡지 않아서.]
[나야말로. 너의 선택을, 이번에는 존중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한다.
미리암. 너에게 선택을 줄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 뒷일은 걱정 말고, 아르드에게로 돌아가렴.]
파도는 잦아들었지만,
카르노스의 분노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분노의 심장이 일으킨 파도는,
시젠과 칼스의 룬어 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룬은 더 이상 문자가 아니었다.
살아 움직이는 혈관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갔다.
붉은 선들이 서로를 물고 엮이며,
도시의 돌바닥 아래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이안 님—!”
시젠이 외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공기가 울렸다.
아니, 도시가 숨을 들이마셨다.
검투장의 북소리가 멎었다.
환호도, 비명도 동시에 끊겼다.
그 침묵 위로, 낮고 둔탁한 맥동이 퍼져 나갔다.
쿵—
쿵—
마치 심장이 뛰듯,
카르노스 전체가 한 번씩 경련했다.
칼스가 이를 악물었다.
“이건… 폭주가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도시가, 선택을 한 겁니다.”
시젠의 손끝에서 피가 떨어졌다.
룬어가 그의 팔을 타고 올라오며,
무언가를 요구하듯 맥박쳤다.
분노의 심장은 파괴되지 않았다.
다만, 미리암의 것이 아닌 채로 남았다.
그것은 이제 인간의 것이었고,
카르노스의 것이었다.
그리고—
왕이 없는 동안,
도시는 스스로 길을 정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