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벽 5시는 밝아지는 하늘을 볼 수 있다.
밤하늘의 별을 보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밝아 오는 하늘의 다양한 빛을 보며 감탄한다.
같은 시간 때지만 하늘의 모습은 다르다. 그 모습을 보며 느끼는 나의 감정과 느낌도 다르다.
어두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걸을 때의 무서움이 새벽의 여명 속에서 고개를 숙인다. 상쾌함과 안정감이 나를 감싼다. 문득 달라지는 새벽의 모습을 왜 당연하게 생각했는가를 떠올리게 된다. 눈을 뜨고 맞이하는 아침이 왜 나에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왜 당연하게 생각되는가에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모든 것은 나에게 당연하다는 전제에서 시작된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다 나의 자녀들 또한 그렇겠구나를 떠올려 본다. 왜 그때 나에게 그렇게 대했을까를 떠올려 보니 나의 아이도 당연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구나가 생각되었다.
부모는 자신이 낳은 아이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자신이 품어서 키운 자식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 본다.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알아서 대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이도 그럴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아이를 보게 된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 자신을 돌봐주는 부모를 의지한다. '엄마'라고 우는 아기의 모습에서 엄마에 대한 절대적 존재감은 아이의 모든 것이다. 그런 아기가 성장해서 세상을 접한다. 부모의 존재감이 또래와의 관계 속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사회적 인정과 관계 속에서 부모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아이나 부모나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당연하다'라는 마음이다. 내가 너를 낳았으니 부모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부모의 마음이 있다. 부모로서 그 정도는 해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자식의 마음이 있다. 서로를 존재 자체로 보고 동등하게 바라본다는 생각을 하더라도 기본 전제의 당연함은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땅 속에 깊이 박혀 있다. 그것이 자꾸 부닥치게 되는 시기가 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할 시기이다. 부모는 자녀를 흔쾌히 보내야 할 시기이고 자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날갯짓을 할 시기이다. 그렇게 푸더덧하는 모습에서 서로는 상대에게 공간을 내어 준다. 부모는 보낼 마음을, 자식은 독립할 힘을 모은다.
당연하다는 단단한 바위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서운함을 표할 때 말이 막힌다.
자녀의 모습이 이해가 되더라도 말이 막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이 막힌다.
성숙한 부모가 아닌 미안함과 함께 최대의 노력을 한 부모의 생색이 말을 막는다.
그러다 나의 부모를 떠올리게 되었다.
표현을 잘하시던 엄마는 늘 대화의 중심이었다. 분위기를 밝게 이끄는 엄마의 말소리가 늘 말수가 적은 우리 가족의 중심이었다. 그런 엄마가 어느 순간 시를 쓰게 되셨다. 자식들이 독립하고 세상 떠난 남편이 없는 빈 둥지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셨다. 그녀의 숲과 늘 푸른 그리움이라는 엄마의 시집에서 자신의 마음을 농축시켰다. 엄마의 말 막힘이 시작할 때를 떠올려 보았다. 자식에 대한 마음이 당연하다에서 미안함 그리고 외로움으로 이어질 때마다 엄마의 말수는 줄어들었다. 엄마의 체념은 자신의 존재처럼 바라보던 자식을 놓아주면서 더 급하게 떨어졌다. 치매로 자신을 놓아버린 엄마의 모습에서 그동안 내가 생각한 당연함이 얼마나 큰 죄였는지를 보게 되었다. 나의 상처와 힘듦만에 집중한 나 자신의 이기심이 보였다. 나의 마음치유에 몰두한 시기와 엄마의 외로운 시기가 맞물린 때가 보였다. 그렇게 우린 서로의 속도와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의 중심이 나라는 것은 마치 새벽의 어둠이 주는 마음과도 비숫하다. 어둡기에 무섭다는 나의 생각이고 새벽이기에 어두울 뿐이다. 엄마는 엄마의 세상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고 나 자신은 나의 세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자녀 또한 그럴 것이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시선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제야 알게 된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도 자신만의 세계의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나의 낮이 꼭 상대의 낮이 아니라도 상대의 시간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의 어둠이 더 이상 무섭게만 느껴지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당연하다는 마음이 그렇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말이 막힐 때가 있다. 서로의 시간 속에서 잠시 기다려 줄 때이다. 이제는 당연함에서 오는 말 막힘이 아닌 어둠운 밤이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부모이기에 말이 막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