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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chel Mar 08. 2022

빛이 없다고 추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망해도 특별한 사진 모음집 1

 핸드폰 갤러리에 있는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어떤 사진을 보게 되었다. 나를 등지고 도로변에 앉아있는. 노란 털을 가진 길고양이 사진. 한참을 들여다봐도 대체 언제, 어디서 찍은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워낙 고양이를 좋아해 길고양이만 보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진을 찍곤 했기 때문에 일일이 기억을 못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날짜를 보면 알 수 있을까 싶어 상세정보를 눌러봤지만 그 작고 귀엽던 고양이는 내 기억에서 아예 사라진 듯했다.


 상세정보를 눌러봐도 이상하리만큼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 사진들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보자마자 (정확한 날짜까지는 아니어도) 그 사진을 찍었을 때의 기분, 계절, 분위기까지 생생한 사진들이 있는데 나에게 필름 사진이 그렇다.


점점 비싸지는 필름 가격.

한번 셔터를 누르면 되돌릴 수도,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할 수도 없는 필름.


이 모든 게 나로 하여금 셔터를 누를 때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다. 36컷 중에 한 컷이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기에 셔터를 누르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사진을 찍기 전에 필름 사진으로 남길 장면을 충분히 즐기고, 머릿속으로 구도를 그려본 뒤에야 소중한 한 컷을 얻는다.



느리게 찍기 때문에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고, 그 기억은 오롯이 나의 추억이 된다.




혜화에 있는 나의 최애 카페 내부. 추운 겨울날 라떼를 마시면서 혼자 무언가를 끄적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천장에 달려있는 주황빛 조명이 인상적인 카페.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던 때에 친구와 함께한 뚝섬 피크닉. 해가 질 무렵 노을이 너무 예뻤는데 풍경이 필름 카메라에 담길지 궁금해서 찍어봤다.
남영동의 카페 외관. 플래시를 터뜨렸는데도 이 정도 빛만 담기다니. 앞으로 야간 사진은 찍지 말아야겠다.
작년 연말 친구와 함께한 호캉스. 새벽까지 떠들다가 찍어본 호텔 내부인데 마치 심령사진 같지 않은가?




빛이 부족해 전부 다 어두컴컴하게 나온 일명, 망한 사진 모음. 하지만 이 사진들은 망했어도 내게는 더없이 특별한, 사라지지 않는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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