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치노매드 Dec 03. 2022

20년 전 포르투갈과의 경기처럼

잠시 뒤면 월드컵 16강 여부를 결정지을 한국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된다.

상대팀인 포르투갈은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만난 적이 있는 상대이다.

20년 전 한일 월드컵에서 말이다.


그때 나는 재수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교에 간 친구들은 거리응원을 하며 여느 때보다 뜨거운 월드컵을 만끽하고 있을 때 재수학원 선생님은 월드컵 열기 휩쓸리다가 일 년 더 공부한다며 애들의 관심을 애써 돌리려 했다.


그날은 우리나라와 폴란드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학원에서도 아침부터 오늘은 언제 집에 갈지, 어디에서 경기를 볼 지 얘기들이 많았다. 워낙 관심사가 높았던 경기였기에 대부분은 저녁 자습을 하지 않고 집에 가는 분위기였다. 늦은 오후가 되자 학원에도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같이 다니던 친구들보다 조금 늦게 학원을 나왔다.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아마도 서둘러 귀가했거나 호프집에 삼삼오오 모여 있겠지. 광화문, 코엑스 등에 사람들이 몰려 있겠지 싶었다. 지하철을 탈 때쯤 전반전이 시작됐다. 지하철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집에 갈 땐 늘 서서 갔는데 긴 좌석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어색했다. 경기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소식이 궁금할 때쯤 갑자기 스피커에서 기관사 아저씨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방금 전 우리나라 황선홍 선수가 폴란드를 상대로 골을 넣었습니다. 한국이 1대 0으로 앞서고 있습니다!"

그 얘길 듣고 사람이 얼마 없는 지하철에서도 여기저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날 우리나라는 월드컵에서 첫 승을 거두었다.


지하철 안내방송에서 월드컵 소식을 전해주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하기도 하지만 그때는 소식을 듣는 사람이나 전하는 사람이나 기쁨이 먼저였다. 그렇게 순수하게 기쁜 마음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을까.


지난 월요일, 우리나라와 가나의 경기가 있었다. 월드컵을 잔뜩 기다리던 딸은 우리나라가 계속 실점하자 전반전만 보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남편에게 안타깝게 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울고 있는 손흥민 선수의 모습과 화가 나서 항의하다 레드카드를 받은 벤투 감독의 영상도 보았다.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나 싶은 마음에 안타깝고 아쉬웠다.


선수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열심히 뛰고 있는데 뭐가 다른 걸까.


20년 전 포르투갈과의 경기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축구를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도 포르투갈과의 경기는 기억나는 것이 몇 장면 있다. 그중 하나는 당시 피구 등 스타플레이어가 많았던 포르투갈 선수들이 우리나라 수비에 꽁꽁 묶여 이렇다 할 공격을 못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 점유율이 적었던 우리가 반격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득점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더. 선수들의 눈빛이 기억난다. 박지성의 초롱초롱한, 김남일의 끈질긴, 안정환의 간절한, 송종국의 앙칼진.


그 눈빛 오늘도 볼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이지만 아이유 콘서트에 가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