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화장실이 하나이다. 덕분에 출근 준비로 바쁜 남편과 나는 아침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말리며 많은 얘기를 나눈다.
“아, 여보랑 사는 게 쉽지가 않아. 여보는 꼬리가 아홉 개 되는 것 같아. 여보가 구미호(九尾狐)니까 은서는 삼(三)미호, 민서는 이(二)미호 야.
“아니야, 우리 엄마가 나처럼 착하고 순한 애가 없댔어.”
라고 대답하는데 순간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치는 무언가가 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유년 시절, 엄마와 아빠의 대화.
“여보는 어째 장모님을 안 닮았어. 장모님은 순하신데 여보는 사나워.”
“무슨 소리~ 우리 엄마는 내가 제일 자기 닮았다고 하셨어.”
#1
1990년대 초,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대관령을 터널로 다닌 지 이제는 한참 되었지만 그 시절엔 진부령, 대관령은 고개를 넘어야 다닐 수 있었다. 우리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네와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생업으로 바쁘신 아빠들을 두고 엄마들은 아이들과 함께 강원도로 향했다. 들뜬 기분으로 차 안에서 간식을 먹으며 점점 진부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가 산고개에 오를 즈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강원도라 그런지 펑펑 내리던 눈은 이내 쌓였고 차들은 줄지어 기어가다가 이윽고 멈추었다. 동네 분인 듯 한 사람이 나오더니 체인을 감지 않으면 고개를 오를 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몇몇 사람은 운전석에 내려서 눈 상태를 확인하더니 차를 돌려 내려갔다.
엄마는 차에서 내리더니 앞 차 친구네와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동네 사람과도 말을 나누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트렁크에 넣어둔 체인을 꺼내 차바퀴에 감고는 천천히 다시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끼 같은 자식들을 뒷자리에 싣고 엄마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진부령 고개를 끝까지 넘어갔다.
#2
비슷한 시기, 한 번은 엄마의 형제들이 우리 집에 모인 적이 있었다. 그때 큰 이모가 간식으로 미숫가루를 우유에 개어 주셨다. 그런데 어쩐지 엄마가 늘 타 주시던 것과 달라 보였다. 대접을 쭉 들이켜 한 모금 머금는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모가 타 준 미숫가루는 건더기(?) 하나 없이 목 넘김이 너무 깔끔했던 것이다. 평소 엄마는 미숫가루를 대접에 붓고 우유를 따른 뒤 숟가락으로 몇 번 휘휘 젓고 나에게 주셨다. 덕분에 잘 풀리지 않은 덩어리들이 꽤나 많았다. 이 덩어리들은 입속에서 하나둘씩 터지며 마른 가루들을 날렸고 나는 컥컥거리면서 지금껏 먹어왔다. 내가 헛기침할 때마다 엄마는 그저 무심히 말씀하셨다. “어, 잘 저어 먹으렴.”
엄마의 지극히 평범한 반응에 나는 당연히 세상의 모든 미숫가루는 이렇게 먹는 것이라고 알고 살았다. 그런데 그날 맛 본 이모의 미숫가루는 나의 미숫가루 세상을 산산이 부숴놓았다.
#3
명절에 차를 타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교통 방송에서는 서울-부산까지 6시간이라고 했지만 할머니 댁 가는 길은 더 가까운 거리임에도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화장실을 자주 가는 편인 나는 차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려웠다. 그날도 꽉 막힌 차 안에서 꽤 오랜 시간을 버티던 중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조수석에 앉아있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 급해.” “삼십 분만 가면 휴게소인데 참기 어렵니?” “아까부터 참았어. 쌀 것 같아.”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수석 옆자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셨다.
노란 바가지였다.
나는 말없이 엄마가 건넨 바가지를 받았고, 조수석 뒤에 쪼그려 앉아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
이윽고 차내 감돌던 긴장감이 해소되자 나는 배가 고픈 것을 느꼈다. 옆 자리에 있던 오빠가 치킨 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잠깐 동안 말없이 오빠를 지켜보던 내가 다시 말했다.
“엄마, 나 손에 묻은 것 같은데… 휴지가 없어.”
“엄마, 근데 나 치킨 날개 먹고 싶어.”
엄마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씀하셨다.
“그냥 먹어라.”
그 이후의 기억은 크게 없다. 그저 치킨 후라이드 날개가 맛있다는 것 밖에는. 물론 지금도 나는 치킨 날개를 제일 좋아한다.
그런 세월을 뒤로하고 지금의 엄마는 세상 온화함과 따뜻함을 지닌 엄마, 할머니, 장모님, 이웃이 되어 계신다. 엄마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까지도 줄기차게 붙어살고 있는 탓에 나는 종종 많은 얘기를 엄마와 나누곤 한다. 엄마가 풀어놓는 그 시절 얘기들은 한결같이 이랬다. 가진 것 없이 서울로 올라온 엄마와 아빠는 헤쳐 나갈 것이 많았다고 하셨다. 엄마는 다시 내려갈지 서울에서 자리를 잡을지 고민하다가 눈앞에 당면과제부터 하나씩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해보고 결과는 후회 없이 받아들이자 하며 젊은 시절을 살아왔다고 하셨다.
어린 시절 그저 쿨하고 당당하게만 보였던 엄마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없이 낯선 곳에서 자리를 잡고 아이를 기르느라 어디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방법을 찾아가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 세월은 온화함보다는 용기가 필요한 시기였다. 그 사정을 알 턱이 없는 철없는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엄마는 내강 외강이야." 엄마는 웃고 마셨던 것 같다.
남편은 가끔 엄마 얘기를 한다. 그리곤 이렇게 매듭짓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렇지, 장모님은 나를 잘 챙겨주셔.”
제사 때가 되면 남편이 좋아하는 홍어무침을 꼭 따로 챙겨 보내시는 엄마를 두고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