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개를 켜다

벚꽃과 목련 덕분

by 마케터유정

마침내 기지개를 켜다

“뭘 할 거면 15년은 해야지. 안 그럼 다 취미생활인겨.” 스타강사 김미경이 말했다. (그녀는 중요한 대목에선 고향 말을 쓴다)


그 기준으로 직장 졸업반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벚꽃과 목련이 활짝 핀 늦봄의 화려한 경관에 눈이 멀고 말았다. 아이유의 봄노래까지 듣다 보니 마침내 황홀경에 빠져 이제는 나도 기지개를 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눈부신 햇살에 잠깐 눈을 감아본다. 가벼운 현기증이 난다. 이 기분이 아주 익숙하다.

정신이 없었다. 일하고 아이 기르다 보니. “워킹맘이라니 대단해요.”라는 말을 늘 듣고 살았다. 고달픈 단어다. 워킹이나 맘이나. 요즘 어떤 드라마가 인기인지도 모르고 회사에서 누가 내 욕을 하는지도 모르며 살았다. 하루가 짧고 일 년이 금방 지나갔다.


주기적으로 낮이 길었다 밤이 길었다 할 뿐이지 내 기준에 해는 뜨면 지기 바빴다. 매일 아침이 되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애들을 깨웠다. 집에서의 고단한 흔적을 말끔히 없애고 회사로 갔다. 회의시간에는 커리어우먼으로 정확한 말을 골라 풀어놓았다. 쉽지 않겠지만 이쯤은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되게 잘하는 척. 아이들이 잠든 밤에는 드디어 주어진 잠깐의 시간이 아쉬워 새벽까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잠이 들었다. 주말에는 기력을 짜내어 아이들과 놀이터에 나갔고 종종 차를 타고 인근 유원지로 향했다. 아이들은 기쁘게 자라주었고 나는 나이 드는 줄도 몰랐다. 남편에게만 나는 줄 알았던 흰머리가(여보 미안) 내 귓가 밑에서 보이던 날, 소스라치게 놀랐다. 삽심대 나날들은 바람에 먼지 날리듯 아스라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서른하나, 서른둘, 서른셋...... 서른일곱, 서른여덟, 그리고 서른아홉.


누구에게 이따금 찾아온다는 ‘그러던 어느 날’ 이 나에게 왔을 때, 문득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싶었다. 노트를 꺼내 내키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좋아하는 책 읽고 서평 쓰기, 동화 쓰기, 블로그 꾸미기, 유튜브 라이브, 책 출판, 부동산 공부, 맛있는 요리 만들기, 아이들과 공부하기. 아니, 내가 하고 싶은 게 이렇게 많았나.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나 지금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 건가?


며칠을 고민하고 몇 번을 망설이다가 포스트잇을 꺼내 적는다.


“하고 싶은 거 해!”

라고 쓴 메모지를 냉장고에 붙였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서 다시 읽어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어제 걸려온 전화가 다시금 생각난다. 탐나는 포지션을 권했던 헤드헌터. 고민하다 지원하겠다 얘기하고는 이력서를 보냈다. 그리고 헤드헌터와 나는 포지션과 지원 전략에 대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 회사 현재 매출은 어때요. 제품의 출시는 어느 단계인가요. 임상 시험은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미국에서 반응은 어때요 등. 응당 물어봐야 하는 질문을 나는 던졌다. 그것마저 패턴이 되어버려 지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포지션에 대하여 얘기하는데 가슴이 뛰질 않았다. 이 일을 하면 너무 신나고 재밌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일로 만나는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더 큰 업무를 맡을 수 있는 자리를 가라고 권한다. 나도 내가 그런 줄 알았다. 2년 전 좋은 포지션에 기회가 되어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40분 정도 예정된 인터뷰는 한 시간 가까이 얘기가 길어졌다. 인터뷰 말미에 HR 임원분이 물었다.

“이 자리, 잘할 수 있겠죠?”

“.......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할 수 있겠죠?”

"...... 네 열심히 할 겁니다.”

“자, 열심히 할 수 있죠?”

”저의 최선을 하겠습니다.”


열정을 기다리는 답정너 같은 물음에 몇 번을 반복해서 기계적인 대답하고는 알았다. 내가 이 자리를 정말로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을.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는지 안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원하는지도 이제 알아 가고 있다. 나이 40에 가까워질 때까지 주변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을, 응당 해야 하는 것을 하며 살았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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