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기분이 어째 으스스하더니..” 상황이 벌어지고 나면 걔 중에는 꼭 이런 말을 한다. 뭐 식스센스라던가.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나 싶다. 아 있었다. 그날의 서늘한 기억은 한동안 잊고 살다가도 이따금 떠오른다. 마치 기억이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속삭이듯이.
#1 인트로
예전 살던 전셋집은 복층 빌라였다.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는 창고로 썼다. 해리포터가 사촌네에 얹혀살던 시절 방으로 썼던 공간을 떠올렸다면 정답이다. 빌라가 대개 그러하듯 붙박이장이 없기에 그곳은 우리의 유일한 개폐식 수납공간이었다.
우리는 결혼하면서 각자 들고 온 짐과 신혼 때 산 짐들 그리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생기는 짐을 창고에 차곡차곡 쟁이기 시작했다. 조각 케이크처럼 생긴 공간을 조금이라도 짜임새 있게 쓰기 위해 안 쓰지만 못 버리는 물건은 깊숙이 넣고 자주 꺼내는 물건은 문 가까이에 두었다.
이런 규칙에 예외인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스키 장비였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 스키는 그저 그림의 떡이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족히 못 쓸 물건인 셈이다. 스키를 옆으로 뉘어 밀어 넣자 길이가 남아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문 옆에 가만히 기대어 놓았다. 덕분에 나는 창고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스키를 무의식 중에 보게 되었고 어쩌다 눈에 들어오는 날이면 그저 언젠가 쓸 날이 있을까 하며 넘겼다.
어린아이를 돌보고 직장일을 병행하는 부부 사이는 대부분 현실적인 관계가 된다. 생사를 묻고 집안 대소사를 처리하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보낸다. 그저 부딪히지 않고 지나가면 운수 좋은 날인 것이다. 남편은 늘 일찍 집을 나가 늦게 돌아왔고 나는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에 쫓겼다.
#2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
어느덧 가을을 지나 완연한 겨울이 왔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어쩐지 서로를 향한 날 선 감정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서먹한 사이가 계속되었다.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말했다. “나 이번 주에 베트남 출장 가. 가서 지사 사람들과 워크숍도 있고 업체 미팅도 여럿 잡혀 있어. 이번엔 좀 오래 있다 올 거야.”
7일이나 되는 긴 출장에 대한 부연 설명이었다. 보통 해외로 나가면 3~4일 정도였는데 이번엔 출장을 2번 붙여 가는 셈이었다.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다.
남편은 토요일 아침 비행기를 타러 새벽에 홀연히 사라졌다. 그의 빈자리를 느낄 여유도 없이 나는 아이들과 아침부터 부대끼고 있었다.
#3 마음속의 아지랑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니 둘째가 오랜만에 점보를 타고 싶다고 했다. 첫째도 옛날 기분을 느끼고 싶다며 맞장구를 쳤다. 창고 속 어딘가에 고이 개켜진 모습이 떠올라 꺼내려면 하 세월이겠다 싶었다. 아이들을 다른 놀잇감으로 돌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입맛을 다시며 창고 문을 열었다. 일단 눈으로 어딘가 있을 점보를 빠르게 찾아보았다.
순간 느낌이 싸했다. 이 위화감은 뭐지. 마치 다른 그림 찾기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창고를 한번 훑었다. ‘뭘까. 이상한데?’
누가 정리한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창고에 별 관심이 없어서 이곳은 내가 정리한 그대로 일 텐데.
'이모님이 정리하신 건가? 뭐가 달라졌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불현듯 익숙했던 그림 하나가 떠올렸다. 예전의 창고 모습. 그러자 곧 차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곳엔 있어야 하는 게 없었다. 바로 스키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내 마음속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무도 없었지만 이 기분을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밖으로 꺼내면 내가 다시 주어 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남편과 나누던 카톡을 다시 열었다. 별 내용은 없었다. 전조도 복선도 깔아 두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나눈 말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와의 대화를 되새김질했다. 유독 길어진 이번 출장. 그래서 그랬구나. 이제야 어렴풋 약간 어색하고 상기된 남편의 표정이 떠올랐다. 심증은 확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일단 친한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내 일인 양 열을 내었다.
“야, 너무한 거 아니니?”
이걸 어떻게 하나 궁리하며 주말을 보냈다. 처음엔 화가 나더니 이윽고 어이가 없었다. 출장 얘기를 꺼내던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딜 갔을까. 베트남에 스키장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일단 인천공항행 버스를 탔으니 국내는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4 모를 줄 알았어?
며칠 뒤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웬일로 면세점에서 홍삼을 하나 사 왔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나는 날씨가 어땠냐고 물었다. 남편은 베트남은 별로 안 추웠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는데 입가에 짜장면을 묻히고 안 먹은 척하는 애들이 떠올랐다. 입을 뗄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미 지난 일이고 하니 다른 기회에 하자 하고 넘겼다.
한동안은 잠잠했다. 남편은 드물게 스키 얘기가 나올 때 일본 스키장이 좋다더라는 말을 얼핏 했다. 그래서 알았다. 일본으로 스키 타러 갔었구나.
아이들이 점차 자라면서 손이 덜 가게 되자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자연스레 남편과도 이야기할 시간이 많아졌다. 그간 미뤄두었던 주제를 하나씩 꺼내면서 아이들 스키를 언제 태울 것인지에 대한 말이 나왔다. 대화가 무르익어 갈 때 그는 무심코 말했다.
“강원도 스키장도 좋긴 한데. 나중에 우리 기회 되면 다른 나라도 다녀보자.” “어 그래. 다른 나라가 좋지?” “어.. 어.”
남편은 살짝 당황한 기색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남편은 잠시 고민하더니 하하 웃으며 어색함을 달랬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5 답사
작년 겨울, 아이들에게 스키를 처음으로 가르쳤다. 우리 관계가 해빙기였던 시기, 남편은 그간 참았던 얘기를 들려주며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거기서 스키 타는 노부부를 만났는데 나한테 일본 사람이냐고 해서 나는 한국사람이라고 했어. 한국 스키장은 눈 상태가 어떠냐 하기에 2월 되면 질퍽거린다고 했지.” “자, 이거 봐봐. 내가 어디 갈지 다 알아봐 두었어.”
그의 말에 다시 떠올랐다. 입가에 짜장면 묻히고 안 먹은 척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남편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일본 스키 출장은 어느새 ‘몰래’가 아닌 ‘답사’로 바뀌어 있었다. 얼마 전에도 남편은 강원도로 홀로 ‘답사’를 다녀왔다. 너무나도 당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