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로 슬프거나 하지는 않아. 하지만 내가 알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으면 빨간불에 걸린 것처럼 하던 일을 멈추게 돼.
몇 달 전부터 스스로를 돌아보다가 문득 내가 좋아했던 책들 그리고 작가들이 생각이 났어.
파크리크 쥐스킨트; 향수, 깊이에의 강요, 로시나 혹은 누가 누구와 잤거나 하는 문제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11분, 오자히르.
그리고 이제부터 이야기하고 싶은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
삶이 잔잔하고 무료했을 무렵 별 뜻 없이 ‘자살’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찾아봤는데 두 권이 눈에 띄었어. ‘기발한 자살여행’ 그리고 ‘자살보다 섹스’. 이때가 대학교 1~2학년 무렵으로 기억나는데 나에게는 첫 번째 책이 훨씬 접근하기 쉬었던 것 같아. (나중에 두 번째 책도 사긴 했어 -.-;;) 이 책을 주문해서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새로운 세계에 휩쓸린 듯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지.
어느 순간 내가 책 속의 주인공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고민을 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있더라고. (기발한 자살 여행은 제목이 갖는 염려와 달리 몹시 블랙 코미디스러운 작품임) 정말로 타임머신을 타고 어디에 다녀온 것처럼 생생한 기분이었어.
한밤중 아무런 목표 없이, 오로지 즐기기 위해서 스키를 타며 넓은 빙판을 가른다. 스키 플레이트 아래서 눈이 뽀드득 소리를 낸다. 머리 위에서 총총한 별이 밤하늘에 둥글게 원을 그린다. 하늘 저 높이 아득히 먼 곳을 올려다본다. 북두칠성, 오리온자리, 사자자리, 작은 곰자리 별들이 보인다. 별똥별 하나가 깜박거리며 사라져 간다.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과 온 세상을 위해 자신도 모르게 얼른 소원을 빈다.
멀리 호숫가에서 여우 한 마리가 외로이 사납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스키 타는 남자는 빙판에 점점이 찍힌 여우의 발자취를 가로지른다. 남자는 마음속으로 온 세상, 삶을 껴안는다. 핀란드에서는 가난하거나 부유한 것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이 모든 걸 체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슴을 벅차게 한다.
아르토 파실린나.기발한 자살여행.2005.솔
책을 다 읽고는 이 사람의 세계가 너무나도 궁금해서 찾아보았어. 그리고 아르토 파실린나는 사람은 핀란드 국민작가라는 걸 어렵게 않게 알 수 알았지. 길고 어두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핀란드 국민들은 매년 가을이 오면 파실린나의 신작이 나오기를 기다린대.
아르토 파실린나 (아르토 파실린나. 유쾌한 천국의 죄수들. 2006. 노매드북스)그의 이야기 속 생생하고 역동적인 체험을 계속하고 싶어서 나는 파실린나의 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어. 역시나 그의 소설은 대부분 즐거웠어. 남녀 사이 친구는 '당연히'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유쾌한 죄수 생활’ (주제가 이게 아니긴 한데…). 핀란드에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두 권의 책, ‘토끼와 함께한 그 해’ 그리고 ‘목 매달린 여우의 숲’. 만약 내가 길을 가다가 사고를 피했다면 정말 오롯이 내 운이었을까. 지켜보고 있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된 ‘천사가 너무해’, 그리고 아르토 파실린나 스타일의 블랙 코미디가 가득한 '하늘이 내린 곰', '독 끓이는 여자', '모기 나라에 간 코끼리' 등
그의 책을 찾아 읽으면서 나의 이삼십 대를 보냈던 것 같아. 현실 문제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을 때 나는 핀란드에서의 생활을 머릿속에 그리며 언젠가 꼭 가리라 마음먹었어. 주인공 오이넨(목 매달린 여우의 숲)처럼 호숫가 옆 산장 속에 살면서 소금에 절인 연어와 따끈한 순록 스튜를 먹고 밤에는 사우나를 해야지. 사우나를 하다 더우면 밖으로 나와 싸리나무를 꺾어 만든 막대기로 등을 두드리며 맥주 한 잔을 들고 하늘에 총총 떠있는 별을 헤아려야지 하는 결심도 잊지 않고 말이야.
좁은 집에서도 뿔뿔이 흩어진 그의 책을 한데 모아 먼지를 털었어. 한 권 한 권을 추억하다 요즘에는 어떤 책을 쓰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봤지. 그런데 요 몇 년 새는 신간이 없더라고. 왜 그럴까 하고 알아보았더니 그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 그가 세상을 떠난 해, 나는 혼자 걸어야 할 사막을 부단히 건너오고 있었지. 그의 작품을 사랑하고 기다렸던 독자로서 그의 부재를 들었을 때 나는 먹먹한 기분을 거둬낼 수 없었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삶이 결정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을 버텨내는 것뿐이었을 때, 그의 책은 나의 피난처이자 또 하나의 보금자리였어. 그 당시 나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했어. 그의 책이 보고 싶으면 지친 거고 그다지 생각나지 않으면 바쁘게 잘 지내고 있는 거였지. 그런 그가 세상에 이제 없다니… 마음이 허전했어. 여러 권을 읽으면서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제는 들어줄 대상도 없는 거야.
있잖아. 아르토 파실린나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피난 행렬 속에서 태어났대. 어려운 집안 환경 속에서 농사꾼, 벌목꾼, 사냥꾼, 고기잡이 등 안 해 본일 없을 정도로 여러 직업을 거쳤다고 했어. 그러면서도 틈틈이 글을 썼대. 소설 속 생생한 장면들은 그가 직접 보고 느꼈던 거였어. 세탁소 사장 렐로넨이 자살 여행을 떠나기 전의 절망과 고독은 파실린나의 것이었구나. 켐파이넨 대령이 느꼈던 사별의 외로움 역시 마찬가지였어. 그래서 글을 읽는 독자에게 이토록 생생하게 전달되었던 거야. 당시의 고통과 삶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블랙 코미디로 승화한 그에게 나는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해.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고마워요. 그는 나의 영웅이자 멘토. 그리고 나의 아저씨.
그 시절,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저씨 덕분이에요.
아르토 파실린나에 대한 기사 하나.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51029/82425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