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회사 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전설의 사원'을 꿈꾸다

by 마케터유정

천둥벌거숭이가 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읽은 책 한 권이 있다.

'전설의 사원'

제목부터 뭐지 싶었다. 내용 또한 이랬다.


'연봉 올리기'와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는 인생이 정말로 행복할까? 내 가치를 좀 더 높일 수 없을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높일 수 있어야 진정한 성공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치란 상사에 대한 아첨, 자격증 취득, 유창한 외국어 실력이 아니다.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려면 적어도 몇 번 정도는 자신을 철저히 싸게 팔 줄도 알아야 한다.

도이 에이지.'전설의 사원'. 2007. 크레듀


회사는 돈 받으면서 세상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니 여기서 나를 철저히 싸게 팔면서 성공과 실패의 결과물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라는 내용이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혈기왕성한 이에게 의욕을 불어넣기 충분했다. 아, 이런 생각으로 회사 생활을 해야 하겠구나 싶었다. 학교의 틀에서 벗어나 본 적 없던 나는 이 책을 바이블처럼 생각했고 따랐다.

운 좋게 들어간 회사는 천둥벌거숭이 같던 나에게 정말로 세상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입사 초, 사내 교육을 마치고 선배들과 함께 OJT(on the job training; 실무를 통해 배움)를 다녔다. 경기도 분당 쪽 거래처를 방문하는 날이었는데 미팅이 끝나자 일정이 바빴던 과장님은 사무실로 들어가라는 얘기를 하고 횡단보도에서 나를 두고 사라져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참아보려 했지만 횡단보도를 다 건넜을 즈음엔 기어이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어떤 이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이 서럽고 분했다. 사무실에 돌아가기 전 공중화장실에 들러 거울 앞 나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somebody가 되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어야지. 천둥벌거숭이다운 생각이었지만 사회생활도 일도 잘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계기였다.

신입사원이었지만 연배 있는 거래처 담당자들과 만날 때에는 미리 준비한 내용을 조목조목 전달했다. 거래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에는 팀에서 건네준 슬라이드가 아닌 내 생각을 담은 슬라이드를 만들어 갔다. 야무지고 일 잘한다는 소리를 조금씩 듣기 시작했다.


작은 성공과 실패의 시간을 부지런히 보냈고 나는 천천히 하룻강아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상사나 선배가 힘들게 할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렵게 들어온 회사인데 다른 사람을 이유로 나갈 수는 없지. 저 문은 언제라도 열고 나가면 돼. 내가 문 열고 들어왔으니 나갈 때도 내 의지로 열고 나가겠어.’


예전에 다니던 회사는 전국에 사업체가 있어서 서울에서 뽑은 사람도 일정기간 지방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부서마다 연차 등 상황을 고려하여 돌아가며 발령을 받았고 어느덧 내 차례가 되었다. 먼저 지방으로 내려보냈던 직원마다 줄줄이 그만두는 바람에 부서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가게 되면 가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다만 한 가지 변수가 생겼는데 마케팅 자리에 공석이 생긴 것이다. 거래처에서 제품을 판매하며 실적을 올리는 일도 좋지만 제품을 브랜딩하고 프로모션 하는 등 제품의 오너가 되어 출시부터 전 과정을 경험해보는 일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 자리에 지원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에 나는 고민 끝에 메일을 보냈다. 나 말고도 경쟁자가 한두 명 더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부서장은 나를 불러 점심을 사주면서 말했다.

“너를 대전으로 보내기로 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쉬움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결론난 문제를 더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이 더 꼬이려 그랬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대전행은 대구로 바뀌었고 그때 좌절감을 다시 맛보았다. 회사는 나를 마음대로 다루는구나 싶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모두들 내가 회사를 그만둘 것이라 생각했다. 지원했던 마케팅에서도 떨어지고 지방근무도 처음에 얘기했던 대전이 아닌 대구로 손바닥처럼 뒤집혔기 때문이었다. 나와 마케팅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였던 이는 자신에게 온 잡 오퍼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한 선배는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위로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심히 지방에 내려갈 준비를 했다. 지방 거래처와 안면을 트려고 기회가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내려갔다. 보통 초겨울에 인사발령이 나면 이듬해 봄 정도 되어야 사택에 이사를 하는 등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나는 지방에서 살 채비를 연말까지 마쳤고 모든 것이 준비된 채로 새해 첫 출근을 했다. 거래처는 서울에서 살던 아이가 용감하게 내려왔다며 잘해주셨고 덕분에 실적도 좋았다.


그 모습을 좋게 봐준 덕인지 회사에서는 해외지사에서 근무할 기회도 주었다. 대만으로 출장 온 부서장을 만났을 때 그는 내게 마케팅 자리에 크게 연연하지 말고 지금 있는 곳에서 실력과 실적을 쌓으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꾸준히 실적을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던 마케팅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회사는 내 삶의 대부분이었다. 회사 밖의 미래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앞단의 선배들처럼 나도 내후년이면 대리가 되고 그다음엔 과장이 되고 팀장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대해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면 회사 또래들과 새벽까지 놀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출근했다.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회사는 여전히 내 생활의 중심이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여자 선배들은 3개월의 출산휴가를 마치면 속속들이 복귀해서 밤 12시까지 일을 계속했다. 그렇게 사는구나 하고 보고 배웠다.


이게 뭘까. 고개를 들고 토를 달기 시작한 건 내가 10년 차가 지나 커리어를 앞으로 어떻게 잡아야 할까 고민하면서부터이다. 선배들에 비추어 커리어 방향을 잡아보면 한국에서 마케팅을 하고 난 다음에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마케팅으로 많이 옮겨갔다. 이 자리는 해외 출장이 잦았다.


아이들을 기르며 출장 잘 다니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엄마엄마하고 걷는 둘째가 어른거려 어쩐지 망설여졌다. 잘할 수 있겠죠 하고 묻는 인터뷰에서 나는 늘 그랬듯 자신 있게, “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무렵 내가 속해 있던 부서가 다른 회사에 팔렸다. 한국에 법인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는 신생 회사였다. 외국계 회사에서는 사업부를 사고파는 것은 흔한 의사결정이었고 지사에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지는 소식이다. 회사에서 많이 강조하는 태도로 민첩성(agility)과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있다. 변수 많은 비즈니스 환경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부단히 변화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인데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이 좌지우지되는 의사 결정에 정작 내 의지는 반영되지 않는구나.’

이런 틀 속에서 있어야 하는 걸까. 미래는 여전히 알 수 없는데 어디까지의 삶의 주도권을 나는 원하는 걸까. 민첩성과 회복탄력성은 이런 상황에서만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고민으로 삼사 년을 보냈다. 회사 밖에서의 삶을 생각하며 공부도 해보고 다른 일에도 기웃거렸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싶어 강의를 듣기도 하고 관심가는 책들도 찾아 읽었다.

어느 순간 조금씩 다른 세상이 눈에 보였다.


회사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삶은 그간 나에게 유의미했다. 수십 명의 직원들과 함께 일하며 법인 차량을 타고 사무실 한켠 자신의 방을 갖는 임원의 모습도 멋지지만 내 시간의 주인이 되어 어디서든 일하는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잘 나가는 회사 사람 누구를 보아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회사 밖을 바라보니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VR/AR, 블록체인, 메타버스, 인공지능, 클라우드, IoT. 무수한 뉴테크 위로 소셜커머스, C2C 같은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코로나는 사람들에게 급격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 변화를 사람들은 절망 또는 기회라고 불렀다. 내가 있던 회사는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안온했다. 이것이 참으로 감사했지만 나는 불안했다. 살아있다면 응당 빠르거나 느리게 맥이 뛰어야 하건만 코로나라는 큰 물결에 변화가 없었던 회사는 나에게는 마치 멈춰버린 심장처럼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회사는 나에게 횡단보도에서 흘렸던 눈물부터
먹고 살아가는 방법과 인간관계를 가르쳐준 뒤
마지막으로 이것을 알려주었다.


회사 생활 14년. 나는 드디어 회사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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