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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치노매드 Apr 22. 2022

딸을 응원하는 법

선의는 빛바래지 않는다

벌써 한시. 오늘은 민서가 기다리던 생일 잔칫날이다. 유치원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집에 오기로 했다. 그전에 파티 준비를 마쳐야 하기에 민서보다 빨리 오는 은서와 둘이서 준비하기로 했다.


은서가 하교하기 전에 얼른 주문한 케이크를 찾으러 나갔다. 집에 와보니 은서는 희주와 풍선을 불고 있었다. 은서와 같은 반인 희주는 집이 근처이기에 종종 하굣길에 우리 집에 들렀다 가곤 했다. 아이들과 담소를 나누며 풍선들을 불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름대로 협업 시스템을 갖추어 아이들이 풍선을 불면 내가 묶었고 그것을 다시 창문과 천장에 붙일 용도로 나누었다. 아이들은 바람 넣는 기구를 이용해 풍선을 불었다. 몇 번 시행착오를 하더니 금세 기구를 솜씨 있게 다루었다. 풍선을 불고 스티커를 이용해 붙이고 끈으로 묶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던지 희주가 말했다. “민서는 좋겠다. 이렇게 엄마랑 언니가 생일파티 준비해주고 축하해주니까.”

부러움이 듬뿍 담 생각을 듣고 내가 말했다. “희주야, 너도 오렴. 이렇게 준비도 같이하는데 참석할 수 있으면 너무 좋지.”


즉답을 하지 않고 잠자코 있 희주는 풍선 몇 개를 더 불고 나니 말했다.

“엄마한테 전화하고 싶어요.”

“어 그래, 내가 연락해줄게.”

연락처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아이에게 건넸다.


“여보세요.”

“어, 엄마 난데. 나 오늘 뭐 있어? 응. 그럼 학원 끝나고 나 민서 생일잔치 가면 안돼? 4시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먹는대.”

통화는 짧게 끝이 났고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꽤 남아 있는 풍선을 불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이번에는 희주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아이가 아직 거기 있나요?”

“네.” 아이를 쳐다보며 나는 파티 준비를 도와주어 고마워서 초대했노라고 말을 거들어주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잠자코 듣고 있던 희주 엄마는 말했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오라고 했는데요. 아이가 계속 거기에 있나 봐요. 집으로 지금 오라고 얘기 좀 해주실래요?”

내 제안에 대꾸 없이 희주 엄마는 본인이 전화한 목적을 짧게 말했다.

 

순간 어리둥절했다.

내가 희주를 집으로 부른 것도 은서가 같이 가자고 하지도 않았. 하굣길에 그저 은서를 따라 집에 온 아이였다. 희주와 엄마 사이에 주고받을 내용을 내가 전달하는 게 적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희주에게 전화기를 건네며 말했다. “엄마가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다시 엄마와 통화하던 아이는 몇 마디 나누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우리 집을 나섰다.

아이를 보내고 나니 도와준 게 고마워 초대한 호의가 남의 집 사정 모르는 오지랖으로 비추어진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서둘러 준비를 마쳐야 했기에 아이를 보내고 다시 풍선을 끈으로 묶는 작업에 몰두했다.


'오지랖이었나.'

은서와 같은 반 친구이고 놀이터에서 엄마들끼리 만났을 때 인사하며 번호도 주고받은 사이였는데. 불편을 넘어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행여 다시 만나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지 아니면 속 편하게 앞으로는 모른 척하고 지낼지 고민이 되었다.


복잡한 속사정과는 다르게 다행히 아이들이 오기 전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조잘거리는 소리와 함께 민서와 친구들은 집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깔모자를 쓰고 돌고래 풍선을 하나둘씩 나누어 주니 아이들은 깔깔대며 즐거워했다. 놀이터에 나술래잡기를 하는 동안 은서 친구 하나가 무리에 끼었다. 다같이 들어와 저녁을 먹고 보니 어느 새 민서의 친구 언니도 와있었다. 아이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까르르 웃 떠들었다.


남편이 예정에 없던 출장을 가는 바람에 저녁시간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러 온 엄마들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 잠잘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어질러진 거실과 방을 대충 치우고 민서와 은서를 씻긴 뒤 잠자리에 누웠다. 아이들은 피곤했던지 이내 곯아떨어졌다.


저녁에 마신 커피 탓이었는지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이 안 왔다.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자 미뤄둔 숙제처럼 희주 엄마와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답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유튜브 영상 하나를 틀었다. 어떤 야구 경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주전 선수의 부상으로 출전 기회를 얻은 데뷔 2년 차의 신인.

경기 중반 동점 상황에서 만루 찬스가 주어졌다. 상황의 중요성을 알기에 타석에 들어서기 전 코치는 그와 가볍게 하이파이브하며 독려해주었다. 그는 타석에서 헛기침을 계속했고 어정쩡한 타격으로 내야 땅볼 아웃되었다.  

경기 후반부에 들어서 이제는 1점을 뒤진 상황. 다시 만들어진 만루 기회에 타석에 들어서는 신인. 이번에는 초구에 배트를 휘두르며 파울플라이 아웃으로 또다시 허무하게 기회를 놓친다.

9회 말 동점 상황. 상대팀은 신인과 상대하기 위해 앞선 타자를 고의사구로 내보낸다. 이제 3번째 맞이하는 만루 기회.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신인에게 자신 있게 치라고 지시한 뒤 내보낸다. 그는 과감하게 스윙하지만 배트는 연신 헛돌았고 삼진을 당한다. 신인 타자는 고개를 떨구고 더그아웃으로 걸어 들어온다.

결국 연장전에 돌입한 두 팀. 연장 11회, 오늘 경기 4번째 맞이하는 만루 상황이었고 타석에는 신인 선수가 들어섰다. 그는 행여 누구에게 들릴까 조용히 심호흡하더니 초구를 받아쳐 공을 담장 밖으로 멀리 보냈다. 마침내 터진 끝내기 홈런.

그는 크게 포효하지도 얼굴에 미소도 없이 그라운드를 돌고는 선배들의 축하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자신을 믿어준 감독에게 제일 먼저 달려가서 포옹했다. 그제야 신인은 웃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은서가 행복해하는 순간을 생각했다. 내가 왜 희주에게 그런 제안을 했지 다시 곱씹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은서이기에 친구를 데리고 오면 나는 항상 반겨주려 했다. 착하고 얌전한 희주는 은서와 잘 지냈다. 풍선을 불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희주는 자기 집은 생일이라고 특별히 케이크를 사거나 하지는 않는다며 내심 분위기를 궁금해했다. 때문에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은서와 생일잔치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희주를 생각해서 그런 제안을 한 까닭이었다. 희주를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지만 두 아이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성의를 표현한 것이다.


신인 선수를 묵묵히 믿고 계속해서 타석에 내보낸 감독처럼 나도 우리 아이를 응원하고 싶었다.

매 순간. 은서가 하는 모든 일에서 돕고 싶다. 그래서 나는 엄마끼리 평소 왕래가 하는 사이가 아님에도, 은서 생일이 아님에도, 미리 연락하지 않았음에도 희주를 초대했다.


그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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