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현상을 탐구하는데 난데없이 ‘지랄’이 웬 말인가 싶겠지만 ‘지랄 총량의 법칙’은 곱씹을수록 깊은 뜻이 있다. 때문에 ‘지랄’이라는 어감에 함몰되기에는 아쉬운 점이 더러 있다.
사전적 의미는 그렇다.
지랄: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
그런데 이것은 특별한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감히 묻건대,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경험이 없는 사람도, 또 한 번만 해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 불편하겠지만 과거의 봉인된 기억을 잠깐만 떠올려보자. 그때 왜 떨었지, 지랄을?
그건 바로 우리가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랄의 특성상, 누가 시켜서 떠는 경우보다는 본인의 의사 혹은 반사적으로 나오는 행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내 안에 있는 깊은 곳에 잠재된 내 모습이 때때로 정제되지 않고 날 것으로 표현될 때 우리는 지랄을 떨게 된다. 내 의사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미처 조절할 수 없는 에너지가 ‘지랄’인 셈이다.
그 근간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었기에 ‘지랄’은 부정할 수 없는 ‘나’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과감하게 ‘지랄을 허하자’고 말한다. 어느덧 에너지가 잦아들고 나면 스멀스멀 깨닫기 때문이다.
‘아, 이런 거구나.’
‘내가 몰랐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었는데..’
이 깨달음을 얻어야 비로소 우리의 행동은 바뀌고 발전하게 된다.
그 부산물인 부끄러움은 어차피 각자의 몫이다. 그러니 구태어 관찰자 입장인 우리가 나서서 지랄을 수습해 보려거나 애써 못 본척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주변에 누군가가 혹은 내 아이가 지금 ‘지랄’ 중이라면 성장하는 과정이라 해석해보면 어떨까. 그리고 잊지 말자. 부끄러움은 오롯이 그의 것이다.
지랄을 허하자고 주장하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앞서 언급한 지랄 총량의 법칙 때문인데, 일평생 떠는 지랄은 한계가 있다는 소리다. 물론 사람마다 그 크기가 다르겠지만 유한하다는 점은 틀림없다. 길어봐야 사람의 일생 안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혹여 어렸을 때 그 에너지를 대부분 소모한다면 커서는 점잖은 사람이 될 것이며 (어쩔 수 없이) 이 나이에도 이토록 팔팔하다면 본디 그릇이 크거나 어렸을 때 차분했거나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분량을 소모하면서 살아가기에 언젠가는 바닥이 나게 마련이다. 유한함이라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기에 그냥 내버려 두자. 캠프파이어를 마치고 남은 불씨를 애써 끄지 않는 것처럼 탈 것이 더 이상 없으면 불은 꺼진다.
지랄을 허하자고 주장하는 마지막 이유는 길고 지난한 난리통을 수없이 겪으며 사람은 성장하기 때문이다.
아직 경험치가 쌓이지 않고 경주마처럼 앞만 바라보는 초임 시절엔 한두 마디 칭찬을 듣거나 자신의 업무 성과를 보곤 정말 잘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생각은 행동에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나 잘해’라는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물론 못한다는 게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만났던 ‘정말 일 잘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겸손했다.
그들이 처음부터 겸손했을까? 물론 성품이 타고난 사람들도 있겠지만 쌓이는 경험을 통해 어느 순간 알았을 것 같다. 세상에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많다는 것을.
겸손한 태도는 가진 것을 지키는 데에도 필요하지만 더 발전을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어제보다 나은 오늘, 내일이 되기 위한 고민의 결과물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더 발전해야 하기에,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기에 겸손과 겸양의 태도는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