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치노매드 Jun 28. 2022

스승의 날, 어쩔 뻔했어?

휴, 물어보길 잘했어!

우리는 아이의 초등학교 진학에 맞춰 이사를 했다.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먼저 보낸 직장선배들은 한두 마디 조언을 해주었다. “1학년은 챙겨주어야 할 것이 많으니 이때 맞춰서 육아휴직을 쓰는 게 편해. 상황이 안되면 연차라도 3월에 몰아서 써야 아이 학교 생활이 잡힐 거야.” 한 친구는 엄마들의 네트워크에 꼭 들어가야 한다며 자연스레 반 단톡방이 개설될 테니 호응을 잘할 수 있도록 이모티콘을 몇 개 사두라 일러주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처음 맞이할 순간을 기다리며 설렘 반 걱정 반으로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그 겨울이 한창일 때 코로나가 등장했다. 3월이 되었지만 학교에 갈 수 없어 ebs 교육방송을 통해 공부했고 교과서를 배부받은 4월 말에 처음으로 담임선생님을 직접 보고 짧게나마 인사할 수 있었다. 그나마 주 1일 등교를 시작한 것은 5월 말이었다. 이쯤 되니 단톡방은 커녕 대안으로 나온 원격수업에 어떻게 적응하는지가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출석체크는 어디서 해야 할지, 수업자료는 어떻게 다운로드하는지.


해가 바뀌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이웃을 통해 운 좋게 아이의 반 학부모 단톡방에 초대를 받긴 했지만 모두들 조심하는 분위기였기에 얼굴 보고 모이는 네트워킹보다는 아이들 학교 준비를 묻거나 코로나 소식을 주고받는 정도였다. 결국 학부모 모임은 없었고 놀이터에나 상가에서 오며 가며 만난 몇몇 엄마들과만 인사를 하고 지냈다.


올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코로나 속 학교 생활에 적응된 엄마들은 오히려 더 빨리 단톡방을 만들었다. 연말연시 확진자 수가 급격히 늘면서 학교에서도 안 걸린 사람보다는 걸린 사람이 훨씬 많았다. 한차례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학교생활은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다 같이 모이는 분위기보다 온라인에서 만나는데 익숙해버린 엄마들은 꼭 필요한 학교 소식 외에는 크게 주고받는 내용이 없었다. 아이가 반장이 되어서 학교에 봉사하러 오라 부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살짝 긴장했던 나로서는 별 다른 연락이 없어서 내심 안심했다.




종종 학부모들과 주말에 키즈카페를 갔을 때였다. 한 엄마가 곧 돌아오는 스승의 날 얘기를 꺼냈다. 이것 때문에 같은 반 엄마들의 단톡방에 초대받았다며 반끼리 논의해서 준비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예상하지 못한 얘기에 깜짝 놀랐다. 마침 첫째와 같은 반 친구 엄마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내 떨리는 눈빛을 본 것 같았다. “아, 그래요? 저는 잘 모르고 있었네요. 다른 반들도 다 이렇게 준비하는 걸까요?”

반에 따라 다를 거라며 준비를 하는 반도 있고 안 하는 반도 있으니 크게 부담 가질 것 있겠냐는 말이 오갔다.


‘그렇죠 하하.’ 하며 넘겼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여졌다. 며칠 뒤면 스승의 날인데 이미 늦지 않았을까 싶었다. 조용히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는데 굳이 일을 벌여야 할까 싶은 마음도 사실이었다. 한편으론 다 하는데 우리 반만 빠지면 아이들이나 선생님이 섭섭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남자 반장 엄마에게 의견을 물을까 말까 밤새 고민을 했다.  내일쯤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출근길에 카톡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준표 어머니, 저 은서 엄마예요.]
 [네 안녕하세요]
 [우연히 다른 반 소식을 들어서요. 스승의 날에 반마다 조금씩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준표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요.]


준표 어머니는 좋다고 호응해주었다. 사실은 자신도 염두하고 있었는데 혹여 원하지 않는 엄마들도 있을까 봐 혼자 고민하고 있던 터라 했다. 둘이서 편지 쓰기, 노래 부르기, 단체옷 맞추기 등 가능한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몇 가지 대안을 떠올려 놓고 반 학부모들의 의견을 묻기로 했다. 내가 명단을 정리하고 준표 어머니가 단톡방에 공지를 하기로 했다.


이윽고 단톡방으로 넘어간 대화에는 많은 엄마들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금세 활기를 띄었다. 여러 의견들이 오가다가 결국 각자 집에서 편지를 써오면 자 반장, 반장이 취합하기로 했다. 스승의 날에 편지를 전달하고 반 아이들 다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학부모들은 각자의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아직 단톡방에 초대되지 않은 몇 명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끝까지 연락이 안 된 친구 한두 명에게는 상황을 설명하는 쪽지를 써서 아이 편에 보내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 반 아이들 모두가 참여하는 행사가 조금씩 형태를 갖추어 가는 중이었다. 8부 능선을 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며칠 동안 스승의 은혜 노래를 연습하고 편지 쓰기만 하면 되겠구나. 엄마들은 오랜만에 서로 소통해서 인지 단톡방에 즐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남자 반장 엄마와 나는 편지 취합을 위해 따로 만나기로 했다. 퇴근해서 아이들 저녁을 먹이고 서둘러 문방구 앞으로 뛰어갔다. 준표 어머니는 편지를 담을 파일집을 벌써 마련해 들고 왔다. 나는 일과 중 쉬는 틈에 만든 파일집 표지 디자인을 가져갔다. 준표 어머니와 나는 서로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스승의 날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점을 알아서 챙겨갔던 것이다. 취합한 아이들의 편지는 정말 정성스러웠다. A4 한 장에 불과했지만 예쁘게 만들려고 테두리를 정성껏 꾸미거나 색종이로 카네이션을 접어 붙인 아이들도 있었다. 선생님의 모습을 그린 친구도 여럿 되었다. 준표 어머니와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드디어 스승의 날, 은서는 두근거리는 마음과 비장한 표정으로 학교에 갔다. 지금쯤 행사를 잘 치렀을까. 저녁까지 어떻게 기다릴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 하교 시간이 되자 반 단톡방에 하나둘씩 소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씩씩하게 노래를 불렀고 선생님이 편지를 받고 많이 기뻐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큰 일을 치른 듯 의기양양했고 신이 나 있었다. 엄마들도 서로 고생하셨다며 덕담을 나누었다. 스승의 날을 불과 며칠 앞두고 급하게 전한 소식이었는데 뜻이 모여서 다행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오늘 학교에서 어땠는지 은서에게 물었다. 은서는 선생님이 활짝 웃으셨고 마지막 교시에는 오늘 없던 체육활동을 하였다고 신나게 떠들었다. 정성을 담은 편지에 선생님은 체육 수업으로 화답한 셈이었다. 하마터면 이 순간을 놓일뻔했다. 휴,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호 팬이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