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도 연차가 늘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눈치 덜 보고 생각하는 대로 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지금은 어리지만 좀 더 자라서 말귀를 알아들으면 편해지겠지라고 생각했다. 그 시간을 어떻게든 넘기고 싶을 때 그런 믿음이 생겼던 것 같다. 생각하기 싫거나 딱히 고민해도 답이 없을 때였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연차가 쌓이자 어느 순간 회사에서 내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계획하고 준비했습니다.’라고 하면 검토 회의를 하면서 일부 변경이 있기는 했지만 제시한 내용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아이들이 일반식을 먹기 시작하고 혼자 옷을 갈아입으면서 외출 준비에 드는 시간이 확실히 줄었다. 예전에는 집 근처 나들이라도 가려하면 유모차, 분유, 젖병, 보온병, 기저귀, 손수건 등 짐이 한 보따리였는데 어느 순간 물병 하나 챙기는 게 전부가 되었다.
그래 맞다. 확실히 편해졌다. 예전에 하던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왜 자꾸 뭔가 빠진듯한 기분이 들지?
얼마 전 시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어머니는 간만에 만나는 나를 보고는 대뜸 “왜 이렇게 얼굴이 안 좋니?” 하고 말씀하셨다. 결혼 이래로 일하고 아이들을 길러온 터라 어머니는 나를 보면 늘 그런 말을 해오셨다. 비단 어머니뿐 아니라 직장동료들도 “얼굴이 힘들어 보여.. 좀 쉬면서 해.” 하거나 친정 엄마도 가끔씩 “요즘도 많이 힘드니?” 하고 물으셨다.
이제는 아이들도 어느 정도 크고 일도 예전처럼 스트레스 받아가며 하지 않기에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어머니의 한마디는 어림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생각해보면 편해지기는 했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은 왜 이럴까?
알고리즘을 타다가 우연히 보게 된 영상에서 생각지도 못한 답을 얻었다.
출처. 유퀴즈
“제가 몇 개를 잘하면 자기 증명이 끝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끝없이 이어지더라고요.”
민희진(Chief Brand officer).하이브
생각해보면 그랬다. 이 일이 끝나면 다른 할 일이 미소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끝없는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하는 요령을 알았다고 해서 일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 거였다. 물론 편하고 조금 더 게으른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그간 참고 기다렸던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놓을 수 없었다.
아직은 내가 할 게 많구나. 여전히 움직이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나를 이해했다.
재택근무를 하던 날 이웃사촌으로 지내는 언니와 점심을 함께 먹은 적이 있었다. 식사 후 인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앉아 있는 게 불편했다. 잠깐은 휴식이지만 오래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써도 될까 싶었다. 오늘 하기로 정해둔 일이 생각나서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콩밭으로 가고 있었다.
이게 나구나. 내 삶은 그릇 안에 담기는 내용이 바뀔 뿐 앞으로도 이런 식이겠구나. 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간 못했던 일을 하려고 이제까지 기다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