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가 부럽다

선택하고 집중할 용기

by 마케터유정

어릴 적 한 번씩 열이 나면 가뿐히 38도를 넘곤 했다. 멍한 표정으로 양쪽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소파에 누워 축 늘어져 있었다. 엄마는 내가 열이 나면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다. 학교에 가지 않는 하루는 시간이 참 느리게 갔다.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없던 그 시절, 유일한 소일거리는 책을 읽는 정도였다. 집에 있던 세계 문학 전집을 순서대로 읽는 것이 작은 즐거움이랄까. 작은 아씨들, 몽테크리스토 백작, 허클베리 핀의 모험, 올리버 트위스트 등 어릴 적 읽는다는 책들을 번갈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작은 방구석에서 뒹굴면서 유독 자주 읽은 한 권이 있었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마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책을 읽고 나면 두어 시간은 금방 지나 있었다. 같은 이야기였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웠다.

로빈슨 크루소와 나는 그렇게 만났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된 나는 어느 날 집으로 오는 길에 들린 서점에서 우연히 완역본을 구하게 되었다.

당장 내일에 대한 고민, 현실 문제로 머리가 아플 때 나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로빈슨 크루소를 꺼내 읽었다. 로빈슨이 무인도에서 집을 짓고 사냥을 하고 옷을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의 흥미진진한 모험에 푹 빠지다 보면 머릿속이 한결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론 로빈슨 크루소를 읽을수록 그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내일 먹을거리에 대한 고민, 맹수를 피해 잠잘 거처에 대한 고민 그리고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 무인도에서의 로빈슨의 삶은 철저히 생존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내가 고민하고 있는 이유와 로빈슨 크루소의 그것은 궁극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신기했다. 로빈슨 크루소는 땅을 일구어 보리를 심을지 양을 길러 고기를 먹을지 치즈를 만들지 매번 고민하고 또 자신의 선택에 따른 충실한 삶을 살았다. 산다는 것은 18세기나 지금이나 다를 게 하나 없다.



책은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내용을 주로 담고 있지만 그는 무인도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 아니었다. 항해 중 표류되어 아무도 살지 않는 섬에 우연히 닿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무인도에 가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배를 타게 되었을까. 로빈슨 크루소는 본디 영국 중류층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중인 신분을 가리켜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천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겪어가야 할 가난과 고역, 노동과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고 상류 계급처럼 오만이나 호사, 야심이나 질투로 고민할 필요도 없다.

바로 이런 신분은 다른 계층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거야. 안온한 상태에서 세상을 점잖게 살며 생활의 즐거움을 충분히 맛보아라. 고통 없는 삶이야말로 행복이라 생각하거라."


실제로 로빈슨 크루소의 집안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넉넉한 편이었다. 또한 로빈슨은 전사한 첫째 형,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된 둘째 형을 대신하여 집안의 기대를 받고 있었기에 더더욱 부모의 바람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로빈슨은 어머니에게 결국 이렇게 말한다.


"저는 세상을 구경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어요. 어떤 일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아 끝까지 해낼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하더라도 떠날 생각입니다."


평범이 주는 행복과 가슴속에 품은 열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상충되는 경우가 많다. 선택의 기로에서 로빈슨은 자신의 꿈을 택했다. 그래서 그는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17세의 어린 나이로 배를 타게 된다. 그리고 첫 항해에서 폭풍우를 겪으며 표류하다 가까스로 구조된다. 떠돌이 기질 덕에 그 뒤에도 그는 몇 번 더 배를 타다 결국 브라질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마음을 다잡고 입신양명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몇 년간 농장을 경영하며 재산을 불린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권유에 결국 또다시 배를 타게 되는데 그때를 회상하며 로빈슨은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파괴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는지, 나는 그 항해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다.

처음에도 아버지의 선의의 충고를 듣지 않을 만큼 방랑욕을 누르지 못했거니와 이번에도 그에 못지않은 욕망이 일어나 이 제안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황급히 이성보다 환상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했다."


그가 탄 배는 또다시 난파되었고 혼자 살아남은 로빈슨은 마침내 무인도에 다다르게 되었다. 결국 로빈슨 크루소를 무인도에 보낸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로빈슨크루소.jpg 로빈슨 크루소 완역본. 문학세계사 (출처: 레이치노매드)



과거 모 대기업 회장은 항상 저녁식사를 두 번씩 했다고 한다. 그만큼 참석해야 할 모임이 많았기 때문이다. 원대한 경영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 그는 하루에 저녁식사를 몇 차례 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직장인들이 그를 귀감으로 삼아야 할지는 모르겠다. 누구에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식사가 인생의 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꿈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평범한 행복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겐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가슴의 불을 따르는 일일 수도 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없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번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리고 우리 삶은 그리 길지 않다. 언젠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에 길지 않은 생에서 선택은 필수조건이 되기 마련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후회와 아쉬움은 남는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집중하였는가'가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로빈슨은 삶의 순간에서 선택을 잘했다. 그에게는 평범한 행복이라는 기회비용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뜻을 펼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꿈을 열심히 따라갔던 것이다.


내가 가장 즐겁게 읽은 대목은 로빈슨 크루소가 화덕을 만들어 빵을 구워내는 장면이다. '햇볕에 잘 말린 건포도를 넣어 만든 빵은 더욱 맛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의 의지로 삶을 선택했고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면서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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