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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 Nov 25. 2023

엄마 딸, 우울증이랑 불안장애야.

아파서 미안해.

23.09.20

엄마에게 평생 전하지 못할 문장들.

혹은 어렴풋이 엄마도 알고 있는 내용들.



엄마, 나야.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누구의 탓도 아니야 그냥 이런 삶도 있는 거야. 나는 엄마가 우리 엄마라는 것만으로 이미 가진 게 너무 많아서 다른 걸 탐하면 안 될 것 같아.



얼마 전에 학원 갔다 와서 밥도 못 먹고 숨만 겨우 쉬며 소파에 누워있으니, 엄마가 입에 과일 넣어줬었잖아.

공부 별로 못 해도 학원 가는 걸로 대견하게 여겨주고,

학원 갔다 와서 매일 밤 포옹하고 뽀뽀해 주고, 치료란 치료는 다 받게 해 주잖아.



처음엔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기도 싫어했던 엄마, 이제는 내 병에 대해 웃으며 얘기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이 병을 받아들여줘서 고마워. 어려웠을 거 알아.



오히려 미안한 건 나야. 내 의지 밖의 일이지만서도. 좀 작게 태어나서 NICU(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다가, 항생제를 밥처럼 먹던 시기를 지나자마자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지.

이사를 괜히 온 것 같다던, 얼마 전 엄마의 말.

아니, 아니야. 그냥 아니야. 괜찮아. 정말로.



눈물 젖은, 아니 눈물로 범람하던 중학교 시절의 작은 방 속 스스로를 너무나 비참하게 여겼던 그 아이가 어떤 모습이래도 사랑할 사람이니까, 엄마는.



어릴 적부터 부모의 감정에 예민하고 인내심 많던 아이는 철이 너무 빨리 들었어. 엄마는 나를 애처럼 키웠는데 난 애처럼 크지 못했어. 그래서 조금 억울했었다? 근데 이제는 아니야. 나와 너무 다른 엄마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지켜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이제 감정 그만 숨겨. 엄마가 그러니까 나도 무의식적으로 모방하는 거래.

.

.

.

엄마 딸 있잖아, 좀 아파.

중학생 땐 적응장애도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늘 두통이 있었나 봐. 그때도 진짜 죽고 싶었다? 학교를 어떻게 정근한 건지 그때의 나 참 대견해. 요즘은 그때만큼 힘들진 않은데, 어째 죽고 싶은 마음은 더 커졌을까.



힘들단 말 한 번 한 적 없는 딸이, 불과 며칠 전에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의 감정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도 안 돼. 다음에 또 그럴 경우에 바로 도움을 받기 위해 다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어. 응급실, 신경안정제, 충동.. 다 엄마에겐 낯선 단어들이네.



엄마 딸, 괜찮지 못해.

이제 숨길 힘도 없어서 괜찮은 척은 못 하겠어.

20년을 힘들게 키운 딸이 엄마의 엄마보다도 세상을 빨리 뜰까 봐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걱정 말라고, 안 죽겠다고, 낳아줘서 고맙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차라리 날 사랑하지 말지.

내가 이 세상을 뜨기 수월하도록.



만약에 내가 자의로든 사고로든 어떤 경로로 죽게 된다면, 내 이기적인 소망은 엄마가 나를 잘 지워내는 거야. 나는 원자 단위로 분해되어 지구 곳곳을 떠다닐 거야. 아주 사라지는 게 아니란 말이야. 내 삶과 상관없이 엄마는 행복했으면 좋겠어.




7월부터 9월까지 늘 했던 생각이다. 우울증이 피크를 찍고 내려오기 전에 쓴 글이라, 조금 자극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께서 마음 아파하실까 봐 미안하단 말을 몇 달째 못 하고 있다. 이게 맞는 거겠지? 말을 안 하는 편이 엄마에게 낫겠지. 상태가 많이 좋아진 요즘도, 힘든 티를 조금이라도 내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그래서 여기에라도 이렇게 써 본다. 엄마, 내가 아파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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