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리 라포는 말이죠…
2023년 5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풀 배터리(Full-Battery) 검사를 받았다. 임상심리사는 내 우울이 만성화되어 내가 잘 인식조차 못 하고 있는 상태라는 말과 함께 내게 상담치료를 권유했다.
6월, 재수생이었던 나는 다니는 학원 근처에 있는 상담 센터에서 가장 빨리 상담이 가능한 선생님께 예약을 했다.
‘라운지’라고 해야 할까? 사람들 몇몇이 앉아있는 공간이 먼저 보였다. 데스크에 계시는 분께서 친절하게 다가오셔서 서약서와 설문지를 전달해주셨다. 왜 센터에 찾아왔는지, 복용하는 약은 무엇인지, 상담으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 정신없이 써내려간 후 주변을 둘러보니 비치된 지 1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빛 바랜 어린이용 책들이 즐비했다.
새로운 환경에서도 긴장과 설렘은 사치인, 나는 우울증 환자. 우울증 진단을 받기 이전부터 감정을 잃어갔던 나를 어떤 새로움도 자극할 수는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으니 엄마 뻘의 여성 분이 미닫이 문을 열고 나오셔서 인사를 나누었다.
지금까지도 늘 대기하는 나를 데리러 나오셔서 하시는 말씀, ”들어가실까요?“
아마 첫날에도 똑같이 말하셨을 거다.
상담에도 종류가 많은데, 그 중 나는 인지행동치료를 받게 되었다. 우울증의 주요 증상인 왜곡된 인지를 고치고 현실적인 조언을 들을 수 있다.
“여기는 어떻게 오게 됐어요?”
(우울, 불안, 강박, 입시, 항우울제 등 다양한 얘기)
“우울이나 불안으로 인해 좋은 점은 없어요?”
“죽음이 두렵지 않아져서 건강 염려증이 덜해져요.”
“지금 많이 힘든가봐요.”
“그래요..? 전 잘 모르겠는데.“
첫 상담을 마친 후 든 생각은
‘이게 뭐지…? 무슨 얘기를 하긴 했는데…’였다.
그건 4회차가 되도록 여전했다. 스무 살 인생 치곤 많은 일들을 겪었던지라 그때까지도 내 이야기를 채 다 읊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선생님께서 내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해주시며 가장 많이 하셨던 말이 “힘들게 살았네요”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참 감동적이고 감사했다.
9회차가 되자 라포(친밀한 유대관계를 뜻하는 심리학 용어)라는 것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시 블로그에 올렸던 글 일부를 가져와봤다.
두 번째 수능을 응시할 때까지 내가 살아있었던 건 선생님의 덕이 가장 크다. 아무리 친밀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할 수 없는 얘기들까지 다 털어놓을 수 있었던 분이기 때문이다. 늘 적절한 조언과 감정적 지지, 위로, 공감은 기본이고, 내가 공부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동시에 인지 왜곡이라는 우울증의 증상에 패배해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셨다.
늘 웃어주시는 예쁜 선생님. 항상 감사합니다. 올해 8월 말, 공부를 다시금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선생님 덕분이에요.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하단 말은 못하겠지만, 그 지옥에서 저를 꺼내주신 것만큼은 정말, 정말 감사해요.
가면 우울증이 심해서 죽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도 방긋방긋 웃는 내담자 때문에 마음 아프신 선생님.
1393이 전화를 잘 안 받는다고 투덜대니 종이를 휘릭휘릭 넘기시며 다른 비상 연락처를 찾으시던 선생님.
나보다도 내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는 선생님.
한 번에 이런 훌륭한 상담사님을 찾다니.
우울증 한창 심할 때는, 조금 변태 같을 진 몰라도, 일주일 내내 선생님 생각밖에 안 했어요. 빨리 상담 가서 죽고 싶다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어요.늘 우울한 얘기 들어주시고, 안쓰러워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