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를 원망하지 말아라

서른이 되어서야 찾아가는 자아 (2)

by radek

소공동 어딘가, 무더운 한 여름의 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해가 중천에서 지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해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지나가는 길에, 오래되어 보이는 카페를 들렀다. 커피 맛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딱 괜찮았다. 원두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으셨던 바리스타 분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 날만큼은 맛보다는 시원함이 중요했고 얼음을 딱 적절히 넣어주신 탓이겠다. 담배 한 대를 피려고 나오려니 카페에 같이 왔던 연인은 굳이 따라 나오겠다고 해서 말리지 않았다.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는 내 옆에 자연스레 약속했다는 듯이 쪼그려 앉아 나는 거리쪽을, 그녀는 벽 쪽을 보았다. 담배가 다 타갈즈음 그녀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벽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담쟁이 덩굴이 보였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니, 담쟁이는 여러 개의 아기자기한 손을 펼쳐서 벽을 지탱하고 있었다. 나는 그 날 담쟁이가 손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날의 담쟁이. 양 옆으로 조그마한 가지와 손을 쳐, 그 가지들이 벽에 붙어 있다


그로부터 약 이년이 흐른 뒤에 그녀와 나는 또 언제나 그랬듯이 집에서 시덥지 않은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유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내가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하는데 까먹었다든지, 티비를 보며 먹다가 흘린 과자 부스러기들을 그녀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날 하필 소파 사이에서 찾았든지, 뭐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늘 사이가 먼 사람일수록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하고, 가까워질수록 받은 마음을 망각하게 된다. 가장 가깝던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오던 길 어딘가에서 잃어버렸고, 그 날은 그저 지속된 원망의 결정체였을 뿐이다. 우리는 그 날 헤어졌다.


헤어지고 짐을 정리하다 그녀가 두고 간 일기를 펼쳐본 적이 있다. 누구도 짊어지라 한 적 없는 삶의 무게를 혼자 짊어진 자의 독백은 참으로 고달프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여기저기에 삶이 지친다고, 일도 괴롭다고, 미워하기 싫다고, 사랑하고 싶다고 포효하듯 적어놓은 그녀의 흔적이 보였다. 머리를 감싸며 계속 읽어내려가던 중에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공책의 한 쪽 귀퉁이에 서툴게 그려놓은 담쟁이 덩굴이었다. 그녀의 벽이 되어주지 못했음을, 내민 손을 내쳤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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