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블라인드 되고 싶은, 블라인드가 만든 요즘 직장 신풍속도
"그거 봤어? 블라인드 어제 올라온 거?" IT전략팀 이과장이 내게 출근하지 마자 와서 한말이다.
"영업본부에 새로 온 ㄱ팀장 저격글말야" 목소리가 너무 크다. 나는 그를 사내 카페로 데려가야 한다.
"차 한잔 하러 가시지요?" 사내 카페에서 무심하게 아메리카노 커피 2잔을 결재한 뒤 물었다. "그게 뭔데요?" 나는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또, 블라인드 이야기였다. 작년부터 유행한다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말이다. 이과장은 최근에 블라인드를 가입했다. 늦게 배운 게 더 무섭다고, 그는 요즘 블라인드에 빠져 있었다. 매일 블라인드를 확인하고, 업무 중에도 본다고 했다. 새로운 신세계라고 했다. 나는 깔아놓고 가입하지 않았다. '왜 안 쓸까?' 혼자 생각했다. 지금도 우울한 나의 회사생활이 익명으로 올려진 누군가의 회사생활의 이야기들을 보면, 오히려 더 우울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그랬다.
그가 보여준 블라인드 내용은 그랬다. 그것도 그룹 라운지에 올라간 글이었다. 그룹에 모든 계열사 직원들에게 공개된 게시글. "영업 1 팀장, 새로 계열사 전입 와서 폭주하는 것은 알겠는데, 왜 밑에 애들까지 괴롭혀, 새벽까지 잡아두고, 목소리 큰 거 보니 전지전능 신이네, 내가 참다 참다 적었다"라고 적혀있었다. "누구?"라는 답글에, "ㄱㅈㅎ"이라 이름도 친절하게 달려있었다. 밑에 대댓글에는 "회의 때 보니, 뭐든지 할 수 있다던데, 천재 납셨네"라는 냉소적인 리뷰들이 달려있었다. 회사에 한 달 전 전입한 영업팀 ㄱ팀장에 대한 게시글이었다. 전입 전 계열사 누군가는 "자신들은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며 선긋기까지 했다. '진흙탕이구나.' 커피를 마시면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쁜 소식을 빠르다. 카페테리아를 지나가는 다른 그룹에서 언뜻 블라인드 이야기가 들렸다.
나는 물었다. "이렇게 블라인드에 내 얘기가 올라가면 기분이 어떨까요?" 이과장이 흥분하면서 이야기했다. "우리 팀장이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올라갔잖아요. 회사에서 일 제대로 하려면, 얘들 다 만족시킬 수 없다고, 본인은 신경 안 쓴다고 그랬잖아요. 본부장한테도 칭찬받았잖아요. 사정 봐주고 일이 안된다고요. 그러더니, 회식할 때마다 술 취해서, 맷날 우리한테 얘기한다니까. 신고 좀 누르라고 "
핸드폰에서 블라인드를 찾아본다. 내가 블라인드를 깔게 된 그때가 떠올랐다. 2주 전이었다. 갑자기 본부 회의가 열렸다. 나도 영문도 모르고, 수첩과 펜을 들고 부리나케 상무실에 들어갔다. 상무는 얼굴이 빨개져있었다.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으라'라고 했다. '아 잘못 들어왔어왔구나' 상무가 날까롭게 소리 질렀다. "누군지 색출해, 빨리". 팀장들은 핸드폰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옆에 최 팀장님에게 구조신호를 보냈다. 입으로 "뭐예요?" 최 팀장은 손으로 블라인드앱을 표시했다. 나는 그제야 블라인드앱을 이제야 깔고 있었다. 옆팀에서 회식으로 한우고기를 먹었다는 글이 블라인드에 올라갔다. 만취한 직원들이 있었단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그런 식으로 회식을 하냐고 쓰여있었다. 회사 게시판에 HOT으로 올려져 있었고, 댓글이 100개 달렸다. 5G 스피드로 댓글을 훑었다. 한우가 문제인건지, 폭탄주가 문제인건지, 어지러웠다. 회식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이 1차 의심자 명단에 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평소에 불만을 보였던 사람 순으로 리스트가 좁혀졌다. 팀장별로 1~2명의 이름이 올랐다. 아이디를 보니, 누구와 유사하다며 추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갑자기 어지러웠다. 1차로 팀원들에게 신고를 누르게 하고, 용의 선상에 올라간 1~2명 직원을 따로 불러서 물어보자고 하고, 회의에서 빠져나왔다.
영업본부 팀장 저격글이 화제가 된 날, 나는 블라인드를 첫 번째 화면에 옮겨두고, 시시때때로 확인을 하게 됐다. L팀장이 인사팀에 가서 면담을 했다고 누구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다시 블라인드를 켜보니 "신고에 의해 숨김 처리되었습니다."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HOT은 익명의 누군가의 사과글이었다. "그 분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는 그저 시켜서 그렇게 악의적인 댓글을 달았어요, 그냥 가볍게 쓴 글이었는데, 계속 마음이 안 좋아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죄송합니다" 댓글이 150개나 달렸다. 사람들은 누가 사주를 했는지 추측이 난무했다. 평소 ㄱ팀장 자리를 노리던 선임 누구아닌 가요? 라던가, 같은 본부에서 ㄱ팀장 때문에, 위기감을 느끼던 옆 팀원들 아닌가요? 라던가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누군가는 블라인드 멀티 계정을 사용하는 K 본부장이 영업본부를 저격하려고 쓴 자작극이 아니냐라는 댓글도 썼다. '이거 또, 신고에 의해 숨김 처리되겠구나.' 한 편의 진흙탕에서 벌어지는 소동극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고 있는 엑스트라가 된 기분, 근데 나에게도 진흙탕이 튀었다. 서로 물고 뜯는 이 소동극에 나는 어지러웠다. 핸드폰에서 블라인드를 다시 찾아, 꾹 눌렀다. X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