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하다 블라인드 될 뻔한 그 때.
“그냥 옆에다 연필로 적어, 식품 대표 아들이라고”
“아, 네..”
김주임은 예전에는 인사팀장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고나면, 당시 채용담당이었던 자기 자리로 와서, 조용히 그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했다. 그러면 면접명단에 비고란에다가 연필로 그렇게 적었다고 했다. 식품대표아들. 이렇게 말이다. 그는 군대의 여느 무용담처럼 나에게 떠들었다. 심심했더가, 신기했던가, 지금 채용담당자인 내 자리로 와서 이런 저런 얘기를 혼자 하고는 했다.
“요즘 공채 경쟁률은 얼마나해?”
“300대 1일 정도 하죠.” 나는 도와줄것도 아니면서, 뒤에서 계속 내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는 이주임이 빨리 가줬으면 싶었다. 심드렁한 나에게. 무심한 그. "많이 올랐네. 경쟁률이" 하고는 아직 버티는 그.
그룹에서 블라인드 채용이 도입되면서, 채용일은 더 많아졌다. 사진, 나이, 학교는 다 한번에 시스템 처리를 통해 블라인드되고, 서류전형을 위해서는 준비할게 추가적으로 생긴거다. 과차장의 블라인드 평가를 지원하기 자기소개서 항목을 더 유심히 봐야했다. 글자수가 크게 비는 게 있거나, 혹은 다른 회사이름이 지원서에 있지는 않은지 사전에 체크하지 않으면, 화살은 나에게 쏟아졌다. 그리고, 그룹 인턴, 그룹 주관의 공모전 등의 가산점 리스트도 체크해야했다.
“야-할일이 줄은 건 이닌가보네”
쉴새없는 무아지경의 클릭을 하고있는 나를 보자, 그제서야 김주임은 말이 없었다. 다행이 인력개발원에 전화, 컴퓨터실 예약 확인건이었다. 다행히 IT교육과정이 없어서, 큰 방으로 변경이 된다는 희소식이었다. ‘야 살았구나.’ 30대 정도의 PC와 노트북이 모두 무리없이 작동해야, 말많은 과장, 차장들의 서류심사가 수월했다. 체크해야 테스트일정을 다시 다이어리에 적어두었다.
점심을 먹고, 지난주 과장, 차장 대상으로 보낸 참석메일에 답장들을 확인한다. 출장이라는 사람, 휴가라는 가람들은 해당 팀장에게 대체자요청의 메일을 보냈다. 오후에도 자기소개서를 읽어다보니 눈이 블라인드 될 지경, 블라인드하다 블라인드 되겠다. 또 놀고 있는 김주임과 차를 사내까페로 내려갔다.
“자기소개서만 보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있냐?”
“동아리 활동이나, 학내외 활동사항 보면 대충 어느 학교인지 알수 있고요. 자기소개서보면 남자, 여자인지는 기본이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림이 그려진다니까요.”
그렇게 얘기하고 나니, 내가 입사할 때, 나를 뽑아준 누군가는 뭘믿고 나를 통과시켜줬던걸까? 궁금했다. 복사하고 붙여서 그룹 이름과 회사 이름만 바꾼 똑같은 이력서였는데.
경기도 어딘가, 150명 버스를 타고 내린 그룹 연수원. 나에게 그 곳은 회사형 인간으로 인생시작이었지만, 나의 자립형 인간으로 인생종점이기도 했다. 아침 7시 30분, 기상 나팔소리에 군대를 다시기는 악몽을 꾸었다. 선두에서 그룹 깃발을 들고 구보를 한다고 했을때, 쓸개즙이 역류하는 줄았았다. 입소 일주일 쯤이었나, 30명 남짓짐을 싸서 나갔다. 모두 똑같이 L그룹에 합격해서 짐을 싸서 나가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논산훈련소에서 6주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기다리던 나와 다른 교육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집근처 동사무소로 가던 공익요원들과 같았다.
김주임이 커피를 마시다 물었다.
“근데 너 연수원 동기들 중에 좀 이상한 애들 없든? 튀는 애들, 아니 튀는 게 아니고, 뭘까? 쟤는 어떻게 들어왔지 싶던 얘들말야”
맞다. 딱 떠오르는 2-3명이 금방 머릿속을 스쳐갔다. 유달리 교육때 지각이 잦았던 K군, 아침구보에 늘 열외였던, 심장이 안좋다던 G양. 발표도 못하고, 이상한 얘기만 늘어놓아 조별활동의 구멍으로 유명했던 L군. 그나마 L군은 연수선배들이 유달리 챙기면서, 계열사 대표 아들로 공공연히 알려졌으니, 낙하산이었는데, 2명은 모두들 꺄우뚱한 과거가 묘연한 친구들이었다.
연수원 생활이 가물가물해지고, 살이 뒤룩뒤룩 쪄서 양복도 잘맞지 않았던 입사 1년차, G양의 결혼식. 로비에 모여있는 국회의원들을 보며, 그녀의 아버지가 네이버에 검색이 되는 유력 정치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혼식은 속일 수 없구나”
동기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참석하지 않은 K군, 법무팀의 동기는 그가 그룹의 자문 법무법인 파트너 변호사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땅끝마을 훍수저인 내가 그나마 그들의 동기라는게 위안이 됐다.
인사팀에 1년도 안된 시간동안, 인사청탁을 보았냐고? 아니 나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인사팀장은 아주 가끔식 그런 전화를 받긴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누가 그런걸 부탁하냐면서 오히려 상대방이 난감할 정도로 칼같이 짤랐다. 그 뒤로 아직도 이렇게 전화를 한다며 불편해했다. 그날 팀내 선임 최차장을 따라갔다가 들었던 그의 말
“요즘 누가 그렇게 대놓고 청탁을 하냐. 티나게. 미리 알아서 준비하고, 그저 서로 귀띰만 주는거지.”
모두가 지켜보는 회사의 채용, 이제는 간간히 진행되던 특별채용, 특채도 없어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블라인드로 거를 사람들이 걸러지면서, 모두가 비슷해지는 경쟁속에서, 내 주변에 VIP들이 간간히 포진해 있는 건, 누군가는 일찌감치 갈 회사를 정하고, 가산점이 주어지는 인턴과 공모전을 통해 남들보다 조금씩 그 간격을 벌리고, 조용히 면접과 그외의 플러스알파를 통해 대규모 공채안에 희석되서 입사를 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들의 경력은 관리되고, 그들은 육성된다. 주력 계열사로의 전배나, 해외연수나 파견 등의 이들을 처음에는 남들보다 반보, 한보 앞선 걸음으로 나아가게 하고, 그 차이는 나중에 따라잡을수 없을 만큼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게임의 룰은 회사의 이해관계에 맞춰져 있으니, 나쁠것은 없다. 주력 부품 업체의 아들이, 정치인의 딸이 옆자에, 옆부서에 근무한다고 해서, 자문 회계법인 대표의 조카가 내 옆자리에서 근무한다고 해서, 나에게, 회사에 손해될 것은 없다. 오히려 플러스가 되겠지. 다만 출발부터 다른 이 게임의 룰 속에서, 그들의 자리를 뺀, 나머지를 차지하기 위해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을 이겨내야 하는 건, 그저 나와 같은 후배들의 몫이라는게 그저 처연할 뿐이다.
그리고, 또하나 아쉬운 건, 나는 후임으로 담당할 그 누군가에게, 김주임이 나에게 했던 만큼 자랑스러운 무용담이 없다는 것이다.
“그 때 특채에서 한 친구가 떨어졌거든, 근데 다음날 대표가 갑자기 나한테 연락을 한거야. 이게 뭐야. 식겁했지. 다짜고짜 나한테 그 친구 왜 떨어뜨렸냐고 하더라고. 당황했지. 근데 생각해보니 명확한 게, 그 친구 면접에 안왔거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대표님 면접에 안 온 사람이 어떻게 붙을 수 있냐고 했지. 그랬더니, 알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 다음날 인사팀장 호출이 온거야. 다시 특채를 하라는거야. 난리났지. 그 다음날 다시 공고 올리고, 5배수 뽑아서 서류전형하고, 3배수 뽑아서 면접 하고, 걔 한명 뽑을라고, 알고보니 대표 친구였던, 모그룹 사장 아들이더라구. 근데 생각해보니 그 때 나는 그렇다치고, 면접왔던 다른 애들은 무슨 죄냐...”
그의 옛날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