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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성훈 Aug 08. 2018

30대가 되면 섹시해질 줄 알았더니

어째 갈수록 막막하냐

0. 풍요로운 취향과 통장은 어디에

용돈으로 연명하던 20대 중반에는 이런 판타지가 있었다. "30대 중반이 되면 돈이 없어서 아빠의 선택에 맞추는 일도, 경험이 부족해서 남의 말에 휘둘리는 일도 없겠지." 그쯤 되면 경제적, 심리적으로 단단하게 안정이 되어 비로소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지금도 좋아하는 게 이렇게나 뚜렷한데. 남 눈치 안 보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가진 게 없어 찌질대는 20대는 너무 구렸고, 시계는 여전히 느렸다.


모두가 동경하는 20대도 별거 없다고 느끼던 시절이었지만, 영화 <청춘 스케치> 거부감이 들지 않는 보기 드문 낭만을 보여줬다.



우리가 필요한 건 이게 전부야.
너와 나, 사소한 대화와 담배 몇 모금,
그리고 5달러.


가장 유명한 장면은 아니지만 유독 이 대사가 기억에 남았던 건 당시의 내 상황 때문이었다. 난 돈도 없는 주제에 대학생이라는 핑계로 해외여행을 떠난 어린 영혼이었고, 없는 돈으로 담배를 샀고, 없는 용기를 짜내 좋아하는 사람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여행은 물론 즐거웠지만 마음 한쪽 구석에는 한국에 돌아가면 3학년 2학기인데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하는 불안이 드라이아이스 연기처럼 깔려 있었다.


덕분에 5달러만 있으면 된다는 이 대사가 낭만적으로 들렸다. 심지어 에단 호크였다. 20대의 에단 호크는 청춘이 사람으로 태어난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저 얼굴에 설득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단 말인가.



개뿔.


지금은 2018년이다. 빅맥 세트 하나 사고 나면 집까지 걸어가야 하는 돈으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학생 시절의 낭만은 사회초년생이 되자마자 바스라졌다. 미각이 눈을 뜨면 통장은 눈을 감아야 한다. 경제적 안정감이 취향을 지탱하는 아름다운 구조는 만들지 못한 채 취향과 안정감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는 게 현실이다. 30대가 되면 섹시해질 줄 알았지만, 서른을 목전에 둔 지금 내 월급은 그다지 섹시하지 않다.


그래서 <소공녀(2017)>의 미소가 위태로워 보였다. 나라면 위스키와 담배를 위해 집을 포기하고 떠돌아다니는 일은 무서워서 못했을 거다. "내가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라고 아무리 발악해봤자 밤이 되면 잘 곳이 필요하니까.


갑자기 마음씨 좋은 부자가 짠! 하고 나타나 집과 먹을거리를 제공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1. 취향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취향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걸까. 잘 모르겠다. 모두가 취향을 말하는 시대다. 뉴스 기사부터 베스트셀러, 오프라인 모임에서조차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진정성을 말하는 바람에 진정성의 진정성이 없어지고 상업화되었듯이. 취향이라는 것도 결국 문화자본보다 경제적자본에 의존하는 모양새다. "취향을 가지려면 좋은 걸 써야지. 쫌 비싸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고, 세련된 물건이니까. 이 물건이 남들과 너를 다르게 만들어 줄 테니까."


분명 취저일 걸?

왜냐면 이건 감동의 토스터거든


프리미엄 브랜드의 유혹은 달콤하다.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걸 알면서도 사놓은 물건들 집에 몇 개씩은 다들 있을 만큼. 의문스럽다. 취향이라는 게 정말 나라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설명해줄 수 있을까? 집에 발뮤다 토스터가 있고, 주말에 엔트러사이트에서 커피를 마시고, 하루키를 읽는 사람이라는 정보는 그 사람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런 국민취향은 '나의 성향'을 뜯어보는 주관식 질문을 무시하고 '무엇을 소비했는지' 확인하는 체크리스트에 가깝다.



요즘 이렇게 취향을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중이라, 영화를 끝까지 봐도 미소가 어떤 마음으로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지 공감하기 어려웠다. '유일한 안식처'라고 언급했다는 것도 후기를 보고 알았을 만큼 와닿지 않았다. 집이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나. 그게 월세든 대출받아 장만한 집이든. 홈리스가 되느니 취향을 포기하겠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친구(민정)에게 바람 든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친한 언니(정미)에게는 염치없다는 말을 들어도 꿋꿋한 걸 보면 본인은 괜찮나 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도 40도를 왔다 갔다 하는 더위에 방문을 닫고 오래 버티는 중이다. 거실에 나가면 에어컨 바람을 쐬겠지만 시끄러움을 견디는 게 더 못 할 짓이라서. 무의미한 TV소리와 왔다갔다 하며 한 마디씩 툭 던지는 가족을 버티는 게 더 힘들다. 담배 가격이 올랐다고 집을 나온 인간이나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하다며 이 미친 더위에 문을 걸어 잠그는 인간이나 뭐가 그리 다를까. 취향을 위해 집을 포기하는 캐릭터가 현실적이냐는 물음이 무색해졌다. 이야기 속 캐릭터가 실제인물보다 더 진한 색깔을 드러낼 때 관객은 비로소 자기 마음속 어질러진 방에서 비슷한 색깔의 퍼즐조각을 찾아낸다.



그래. 취향은 꽤 중요하다. 당신의 취향이 좋아하는 아이템을 고르는 일(구매)을 넘어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자유)를 선택하는 일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나 역시 공감한다. 그리고 그 취향을 위해 안락함을 버리는 선택에는, 마치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싸움에 뛰어들 때와 비슷한 약간의 숭고함마저 묻어있다고 생각한다.



2.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취향

한편, 미소는 집을 포기했지만 관계까지 포기하는 인간은 아니다. 그녀의 취향 목록에는 위스키와 남자친구(한솔)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불쑥 찾아와 하룻밤 재워달라는 미소를 사람들이 거절하지 않았던 것도 다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베풀며 살았기 때문이다. 대학시절에는 다단계에 붙잡혀갔던 언니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술 마시고 자신의 자취방에 들이닥친 친구를 재워주기도 여러 번.



지금은 얹혀지내는 신세지만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친구집에서도, 이혼한 뒤 실의에 빠진 동생집에서도 청소와 요리로 보답한 다음 감사의 쪽지를 남기고 조용히 떠난다. 비록 부자가 되어버린 밴드부 언니 집에서는 감정싸움이 벌어지고 굴욕적인 퇴장을 요구받지만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일관성도 있다. 염치와 취향을 뚜렷하게 지키는 곤조는 결핍을 매력으로 바꾸어놓는다.


영화 <요노스케 이야기>가 떠올랐다. 민경훈을 닮은 주인공은 늘 태평하고 어리숙하게 웃어대는 캐릭터다. 왜 저러나 싶고 딱히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그를 떠올리면 누구나 미소 짓는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요노스케를 아는 것만으로 이득을 본 기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요노스케처럼 살지는 못하지만 누구에게나 요노스케가 필요하다며.


미소도 그런 캐릭터 같다. 미소처럼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떠올리면 미소짓게 만드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떠올리기도 했다. 영화는 고등학교 절친이었지만 졸업 후 직장인, 자영업자, 알바생으로 각자의 현실을 마주한 뒤부터 우정에 상처가 나는 모습을 그리는데, 그 누구도 완전히 착하거나 완전히 나쁘지 않다. 그저 서 있는 위치가 달라졌고 걸어갈 길이 갈렸을 뿐이다.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던 시기는 이미 지났지만 내가 아닌 너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법을 아직 익히지 못했을 뿐이다.


다시 취향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취향이 물건과 결합할 때는 질문이 간단하다. 그게 무엇what이냐고. 뭘 좋아하냐고만 물어도 얼마간 대화가 이어진다. 하지만 취향의 대상이 사람일 때는 어떻게how 바라봐야 하냐는 물음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대충 뭉개고 넘어가도 결국 다시 찾아온다. 이제 미소를 보는 관점이 정리된다.


미소는 집을 포기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


<요노스케 이야기>와 <고양이를 부탁해>는 캐릭터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사정과 입장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아낸다. '앞으로 이렇게 살아'라는 식으로 정답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공녀>와 두 편의 영화는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고양이를 부탁해>는 청춘팔이가 돈이 되지 않던 시절에도 단단하게 청춘의 편에 서 있던 영화로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다.


진정한 후렌치 후라이의 시대는 갔는가(고양이를 부탁해OST) - 별


3. 답은 간단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청춘 스케치> 최고의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위노나 라이더가 졸업생 대표로 스피치를 하는 단조로운 원테이크.


어른들은 우리가 왜 직장에서 주 80시간 일하기를 거부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만든 BMW를 사려면 그렇게 해야 할 테니까요. 또 우리가 왜 반문화counterculuture에 관심 없는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에 혁명을 팔아넘기는 장면을 우리가 보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습니다. 우리는 뭘 해야 할까요? 기성세대가 망가뜨려 놓은 것들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졸업생 여러분, 답은 간단합니다.

답은..


답은 다음 페이지에 적어두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다음 페이지가 없어졌다. 허둥대며 페이지를 뒤적거리고, 졸업생 모두가 나(위노나 라이더)를 바라보는 상황. 낭패다. 대사가 기억나지 않지만, 더 지체할 수는 없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른 다음 꽤 또렷한 목소리로 답을 말한다.



"잘 모르겠다"는 한 마디에 졸업생 모두가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낸다. 나 역시 아는 척하지 않는 이 장면이 마음에 쏙 들어서 대사를 받아적고 책상 앞에 포스트잇으로 붙여놓기까지 했다. 우리가 기대한 건 완벽한 답이 아니었다. 심지어 잘 될 거라는 희망이나 다 괜찮다는 위로조차 필요 없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안 좋을 수 있다는 것쯤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


그저 이 막막함과 답답함이 여기에 있다고 인정하는 목소리가 필요했다. 자신의 마음속에도 그런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해줄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 같다.


스크린 속에서 의외의 선택을 거듭하는 미소는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나한테는 취향이 이만큼 중요한데 집을 가지려면 이걸 양보해야 하냐고. 지금까지 난 취향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돈 계산을 해보니까 흔들린다고. 그래도 다르게 살아보려고 하는데 니가 다르게 사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누군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다 같이 갑갑함을 공유하자는 거였냐"라고 하거나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지 않냐"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맞다. 여전히 갑갑하다. 조금 안정되어가나 싶으면 금세 불안해진다. 커리어는 어디로 가는지 종잡을 수 없고, 대인관계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처음과 같은 문제를 마주하고 있지만 24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다. 마치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하늘에서 보면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것 같지만 옆에서 보면 꾸준한 성장의 궤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이제는 낙담하거나 불평하는 시간을 줄이고 다른 선택지를 적극적으로 찾아볼 에너지가 생겼다. 똑같은 상황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내린 괜찮은 사례 몇몇을 떠올릴 수도 있게 되었다. 중요한 건 그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미소의 선택은 단순히 둘 중 하나를 포기함으로써 완성되지 않았다. 그녀는 얄궂은 상황에서 자신의 기준을 다듬었고, 반강제적인 설득에는 적극적으로 싸웠다. 그렇게 지켜낸 그녀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어 기쁘다.


이렇게 다양한 선택지를 만나며 생각의 경계를 허물고, 기존에 없던 사례를 떠올릴 때 주체적 선택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어차피 답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의 선택을 밀고 나가는 의지만은 기억해두자. 언젠가 불확실한 길을 걸어갈 때  유용한 생활근육으로 쓰일 테니까.


확신이 아니라 실험이라는 생각으로 길을 걷는 건 정말 성격에 안 맞지만, 별 수 있나. 걷다 보니 알게 됐다. 오답을 발견하는 경험도 분명 귀중한 자산이라는 걸.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느낄 때, 아직은 탐색 기간이라는 생각이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스스로 되뇌자. 멀리 온 것 같아도, 돌아갈 수 있다. 30대의 섹시함은 매번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거치며 다듬은 주관, 그리고 의도치 않은 실험결과까지 끌어안는 여유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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