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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성훈 Aug 30. 2018

누워있는 악마에게

알려고 하지 않은 죄

0.

아직도 고등학생으로 돌아가는 악몽을 꾼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게 희미해졌지만(더 이상 귀신이 무섭지도, 군대에 이를 갈지도 않게 되었지만) 괴로웠던 학창시절은 지워지지 않나보다. 성적이 오를수록 더 갑갑해졌던 그때가.


칸막이가 쳐진 자습실. 자리에 앉아 한참을 공부하다 잠깐 일어나보면 모두가 똑같은 자세로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다. 1타 강사의 인강을 듣는 친구나, 열심히 EBS 문제집을 푸는 애나, 과외를 받는 우등은 각자 다른 페이지를 보고 있었지만, 모두가 똑같아 보였다. 익숙한 풍경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하루에 14시간씩 공부해가며 겨우 성적을 끌어올린 참이었다. SKY를 가느냐 못가느냐는 고작 수능 1~2문제 차이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알게되었고, 그 다음부터 모든 게 이상해 보였다. 수능으로 인생이 결정된다는 어른들 말이 맞다면, 실수 한 번에 앞으로의 80년이 좌지우지 된다는 건데. 그런 시스템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게 틀림없다. 평소에는 개성 넘치면서 다 똑같은 학생인 척 묵묵히 공부하는 친구들조차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못마땅한 건 나 자신이었다. 이게 잘못됐다는 걸 분명 아는데, 나는 왜 가만히 있는 걸까. 친구들을 설득해서 시위를 하든가, 교육청 게시판에 탄원서라도 쓰든가, 아님 학교를 때려치고 다른 일을 찾든가. 하지만 난 그 무엇도 하지 않았고, 뭘 해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합리화만 했다. 뭔가 깨달은 척, 고뇌하는 척 했지만 결국 내가 한 거라고는 합리화뿐이었다. 대신 공부를 손에서 놔버렸다. (부끄럽게도) 혼자만 아는 반항이었다.



1.

합리화 끝에 내린 결론이지만 나름의 고민은 있었다. 학교를 때려친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떡하지? 답이 없었다. 나 하나 학교 그만둔다고 시스템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내 인생이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다. 대안학교나 검정고시처럼 자퇴를 하는 순간 남겨진 선택지는 패자부활전같이 느껴졌다. 트랙에서 벗어나는 게 꼴지로 달리는 것보다   무서웠다(이대로 가만히 있기만 해도 꼴지할리는 없다는 자신도 있었다).


시위를 주도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매년 성적비관으로 자살하는 학생이 뉴스에 나와도 교육부는 변화할 조짐을 안 보이지 않나. 오히려 해가 지날수록 자살한 청소년에게 신문이 할애하는 지면이 좁아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고등 중 하나뿐인, 3학년 2반 28번인 (딱히 영향력이나 백업이 없는) 내가 몇 명 설득해서 시위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고작 공부를 하지 않는 거였다. 힘이 없으면 용기라도 있어야 하는데 둘 다 없어서 도망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한창 혈기왕성한 청춘이면 거칠게 저항도 해보고 쥐뿔 아는 것 없어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수능공부를 접 아무일도 없는 척 지내는 동안 나는 성실한 학생도, 저항정신 가득한 10대도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수능날, 머리속에서는 1인 시위도 여러번 했지만 결국 잠자코 수능을 치렀다(웃기는 일이다). 1교시는 설렁설렁 휘갈기는데 답안지를 마킹하는 손이 이상하게 덜덜 떨렸다. 그리고 2교시는 왠지 모르게 1교시보다 좀 더 열심히 임했다. 고사장 안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공부를 안 해도 이만큼 할 수 있다고 평가받고 싶었는지, 인생이 걸린 시험이라는 압박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그 뒤에 있었던 아빠와의 거실대첩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다).


2008년 수능 고사장에서 나는 소리없이 앉아 있었지만 충실한 수험생도 아니다.


돌이켜보면 이 일련의 과정 속에 '위력'이라는 녀석이 녹아있던 게 아닐까. 누가 칼 들고 협박하지 않아도 된다. 으로 강제할 필요도 없다. 고등학교 이수는 의무가 아니었지만 제3의 선택지를 위한 제도/시설/인식이 현저히 부족한 상황이라면 고졸학력은 필수가 된다. 심지어 전국 수험생의 인생을 손에 쥐고 있다고, 비행기마저 멈추게 하는 시험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와중에 학생다움으로 규정된 역할은 10대의 혈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둘 중 하나라도 채우지 못하는 순간 모자란 인간이 된다.


위력은 이렇게 위력을 가지지 못한 자의 약점을 쥐고 흔들며, 선택의 자유를 없애고, 모순적인 2가지 역할을 동시에 부여해서 언제든지 비난가능한 상태로 만든다.



2.

성폭력은 성 범죄이자 폭력 범죄다. 그리고 폭력이라는 단어에 이미 상대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왜 성폭력을 당한 다음날 왜 조용히 출근하고 일했는지 묻지 않기를 바란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냐고 물어서도 안 된다.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은 아니지 않냐는 프레임도 걷어내자.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게 위력이니까.


한동안은 그들이 몰라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 판사는, 그리고 안희정은 위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몰랐을까. 나는 어렴풋이 알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진 위력이 재판의 심리과정에, (애정에 기반했다고 착각하는)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을까. 분명 머리속에 스쳐 지나갔을 거다. 다만 거기에서 멈춘 거겠지. 위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면 괴로워질테니까.


결국 위력과 관련된 그들의 죄는 알려고 하지 않음이 아니었을까.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무지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전략 말이다. 젠더 이슈는 복잡하고, 어렵고, 가진 자에게 불편하다. 그러니까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분명히 목격하면서도 더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는 시대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조건을 지키기 위해서 남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나와 다른 위치와 상황에 놓인 사람의 일상이야기는,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보이는 표정과 감정의 뉘앙스를 읽어내는 것까지가, '알려고 함'에 다가가는 길일테니까. 아래의 목록은 앞서 말한 당위적 차원은 물론이고, 이야기 그 자체로서 충분히 높은 완성도와 몰입감을 제공하는 콘텐츠다.



<웹툰>

비혼과 결혼 사이에서 - 하면 좋습니까


엉망진창이다. 당신의 방도, 어떤 남자들도 - 당신의 하우스헬퍼 시즌4


성범죄 그 이후의 사적인 이야기 - 콘스탄쯔 이야기


결혼 후에도 조화로운 삶을 위해 - 어쿠스틱 라이프


독보적인 언니 - 퀴퀴한 일기



<칼럼, 책, 글>

위력이 작동했을 때 피해자가 짓는 표정 - 무서워서 웃었다


위력에 저항한 순간 - [사유와 성찰]위력이란 무엇인가


1심 판결에 대한 법적 해석 -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판단


무죄판결 이후에도 이어지는 연대 - 에너지가 없는 사람도


전략적 선택으로써의 무지 - 큐리어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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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 3m부터 바꾸는 미디어 - 닷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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