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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dioholic Dec 07. 2024

사람들은 변하더라...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그리고 '너무 다른 널 보면서'를 들으며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모두 변해가는 모습에 나도 따라 변하겠지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그래 너도 변했으니까
너의 변해가는 모습에 나도 따라 변한거야
(봄여름가을겨울,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中)


사람들은 변한다. 하지만...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처럼, 사람들은 변한다. 그건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직업을 갖고, 부양해야 할 사람들이 생기고, 어떤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그에 맞춰 해야 할 역할이 생기니까. 마치 배우가 작품마다 캐릭터를 바꾸는 것처럼.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할 것은 변하는건 인정하되 어떻게 변하는가에 있다.


어두웠던 독재정권 시절에 민주화의 투사로 불리며 뜨겁게 투쟁했던 사람들이, 밝은 세상이 온 후 자기 자리보전을 위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말을 일삼는 모습들을 본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직장 안에서도 그토록 회사의 불합리함을 욕하던 이들이, 정작 자신이 책임자의 지위에 오르면 그 불합리를 합리화하거나 후배들을 짓누르는 장면은 흔하지 않던가. '남들도 변하는데 왜 나는 변하면 안 돼? 다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라며 그들이 내세우는 현실론은 늘 사람들이 지켜야 할 염치와 신념을 이긴다.


https://youtu.be/5fgKaHetRcw?si=KOqzirHIkYQ074uO

봄여름가을겨울,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심지까지 변하지는 않기를...


타인의 변화에만 주목하며 서글퍼할 일은 아닌 것은 그걸 바라보는 나 역시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처럼 신념과 염치를 잃고 현재의 알량한 성취에 오만해질 수도 있고, 누군가의 변절에 실망하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 폐쇄적이 될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시류에 영합해야 할 때도 있고, 주변의 분위기에 맞춰 역할을 바꿔야 할 때도 있겠지만 내가 지켜야 할 심지는 지켜야 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 심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속성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나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믿음조차 무색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겠지만
늘 모든 건 변한다고 하지만
나 여기 이대로 서 있는걸
이제 너무 다른 널 보면서
(이소라, '너무 다른 널 보면서' 中)


세파에 시달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흔들리며 부득이하게 변할지라도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예전의 내가 가졌던 본래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신없이 너무 먼 길을 가버려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땐, 나를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던 소중한 사람들이 나와의 인연의 끈을 아주 단호하게 놓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끈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만의 심지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도. 이소라의 '너무 다른 널 보면서'를 들을 때마다, 한 사람의 위태로운 모습을 지켜보며, 상처받고 흔들려도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누군가의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안타까워진다.




사람이 살면서 변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변하다 못해 변질되고 부패해 버려 회복될 수 없을 지경까지 가서는 안된다. 뉴스에서, 회사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참담하고 불쾌한 감정이 빈번해지는 것은, 결국 그만큼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겠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어제 이 두곡의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다짐하게 된다. 전혀 다른 결의 두 곡이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꼭 들어보시기를 추천드리는 좋은 노래들이다.


https://youtu.be/_HVUe5zDOR8?si=L3ht9JSHGcdcyw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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