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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오네(by 10CM)

눈을 맞이하는 어른들의 마음

by radioholic
눈이 오네 저만치 하얀 눈이
방울져 창가를 지나
사람들과 사람들의 그림 같은
기억에 앉아 녹아가네
(10CM, '눈이 오네' 中)


코로나19가 오기 전까지는 2년마다 겨울에 홋카이도에 갔다. 한 해 동안 고생한 나에게 선물을 주는 우리 부부만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온통 눈 밖에 없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쌓인 눈을 자박자박 밟는 기분, 눈 쌓인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기분, 눈 내리는 밤에 노천온천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있는 기분... 이 모든 게 휴식이었다. 그리고 어느 눈 덮인 작은 동네를 지나가며 이런 곳에 집을 마련해 두고 겨울에 찾아와 3개월 정도 머무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건 지금도 마음속에만 품고 있는 나의 버킷 리스트이기도 하다.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린 시절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져 버렸다. 어릴 땐 그저 눈이 조금만 내려도 뛰쳐나가 볼이 빨개지고 손이 얼어붙을 때까지 눈 위에서 뛰노는 게 그렇게나 좋았지만, 이제 나에게 눈은 접촉이 아닌 관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날의 그 고즈넉함과 쓸쓸한 분위기를 즐기는, 그저 바라보며 차 한잔 마시거나 노래를 틀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성격이 변한 것인지, 나이를 먹어서인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160228_snow_1.jpg 이런 장면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눈이 내리면 수많은 노래가 떠오르지만, 눈 내리는 날의 쓸쓸함을 느끼기엔 10CM의 '눈이 오네' 만한 노래가 있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타 하나에 목소리 하나라는 구성으로, 사람의 고독하고 허전한 감정을 이토록 잘 표현하는 노래는 정말 흔치 않기 때문이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머리를 스치는 수많은 생각과 회한들, 이유 없이 울컥하고 먹먹해지는 마음이 이 곡을 들으면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느껴져서 좋다. 온통 하얀색만 존재하는 눈 내린 풍경처럼, 기타와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성이 주는 힘이다.




난 권정열과 윤철종이 함께 하던 시절의 10cm가 너무나 그립다. 그들의 재기 발랄한 퇴폐미가 좋았고, 그런 퇴폐미를 잠시 걷어내고 윤철종의 따뜻한 기타 사운드에 권정열의 서늘한 목소리를 얹어 이런 서정적인 발라드를 부르는 모습에 홀딱 반했더랬다. 여자 친구와 싸우고서 바람피울 때, 다른 여자와 입 맞추고 담배 피울 때 아메리카노가 좋다는 '아메리카노' 속 가사는 쓰레기 같음에도 밉지 않았고, 날 의자에 묶어도 좋으니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자는 '오늘밤은 어둠이 무서워요'는 그 나이 또래 남자들의 허튼 수작을 보는 것 같아 재미 있었지만, 그런 노래를 부른 후에 자세를 고쳐 잡고 '스토커'나 '그러니까' 같은 곡을 나지막이 부르는 야누스 같은 모습은 오직 십센치만이 가질 수 있었던 엄청난 매력이었다.


한 때 잘 놀던 권정열이 이젠 너무나 착한 오빠가 되어 '그라데이션'과 같은 청량하기 그지없는 노래를 부르며 허리춤을 추고 눈을 찡긋하는 모습은 도저히 즐길 수 없어 아쉽다. 젊은 시절 원 없이 놀아본 사람이 세상 모범적인 가장이 된다는 말은 권정열을 위해 있는 것일까. 물론 지금 누리는 인기의 정도는 예전의 10CM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눈이 펑펑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파블로프의 개처럼 이 노래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볼 수 없는, 어색한 표정으로 기타를 치던 윤철종과 그 곁에서 개구지게 노래 부르던 권정열의 투샷이 그리워졌다.


https://youtu.be/_eOm5wyp3VU?si=RsmrAoFqzqcnwFBt

눈이 온다. 그러니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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