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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dioholic Mar 08. 2024

따뜻한 말 한마디

마음의 보일러가 필요하다면...

설 연휴를 이틀 앞둔 새벽, 우리 집 보일러가 끝내 수명을 다했다. 온수나 난방을 켤 때마다 어마무시한 굉음을 내며 허덕이던 녀석이 하필 연휴 직전에 퍼지고 만 것이다. 이 아파트가 지어질 때 설치되어 약 20년을 혹사당하다가 운명한 셈이니 미워하기에도 미안할 지경. 문제는 이틀후면 연휴 시작인 데다, 보일러 앞에 우뚝 서 있는 워시타워를 해체 이동해야 하니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사실을 집주인분들에게 알리고 보일러를 당장 바꿔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는 것.


이 집을 구할 때부터 지금까지 집주인분들은 한 번도 우리를 야박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목돈이 들어가는 보일러 교체를 얘기하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더라. 급박한 상황을 설명하는 장문의 문자를 구구절절하게 보낸 잠시 뒤, 집주인(집주인 부부 중 부인이셔서 사모님이라 부른다) 쪽에서 바로 전화가 왔다. 기다리던 전화임에도 살짝 망설이다 받으니 그분 특유의 경쾌한 목소리가 울린다.


아이고!!! 간밤에 추워서 어떻게 했대요! 괜찮았어요?


어쩌면 그냥 인사치레일 수도 있었겠지만, 첫마디부터 우리 부부를 걱정해 주시는 그 말씀이 너무 고마워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보일러야 워낙 오래됐고 예전에도 고장이 났었으니 이런 날이 결국 찾아올 줄 알았다고 당장 연락해서 바꿔주겠다는 웃음 섞인 얘기들을 들으며, 회사 복도에 서서 감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음에도 연신 허리를 숙여가면서. 


왜냐하면... 진심으로 고마웠기 때문이다. 어른다운 어른으로부터 위안을 얻은 게 너무나 오랜만이라 그랬다. 그전에 살던 집에서도 보일러가 고장 나 바꿨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귀찮아하며 비용부터 따지는 집주인 대리인의 태도에 서로 날이 선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당시 집주인은 상당한 부자라 감히 직접 연락을 할 수 조차 없었다) 이런 집주인분들의 배려 덕분에 연휴 직전 이틀 동안 우린 보일러를 바꿨고 아주 따뜻한 명절을 보냈다. 몸도 마음도.




누군가가 아쉬운 부탁을 망설이며 했을 때, 일단 그 사람을 걱정해 주며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대개 부탁하는 사람의 처지라는 것이 그리 좋지 않은 게 대부분이고, 부탁을 받는 상대방의 입장을 알 수 없는 불안함 속에서 듣는 그런 한마디가 큰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살기 힘든 세상이라서인지, 요즘처럼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각이 잡혀있고 좋은 말에 인색한 세상에선 더더욱 그런 온기 품은 말들이 소중하다. 다들 똑똑한 척 빈틈없는 척하지만, 사실 그런 따스함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 같은 일들이 어쩌면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겐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남들을 도와줄 돈은 없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헤집는 말들은 버리고 상대방의 곤궁함이나 어려움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감싸안는 말들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런 따뜻한 말 마디가 요즘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한 많은 일들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보일러로 인해 벌어진 작은 해프닝이 어떤 것도 비할 수 없는 뜻깊은 명절 선물이었다. (이 글을 보시진 못하겠지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보일러야... 그동안 고생했고 니가 힘들어서 울부짖을 때마다 짜증내서 미안해.(근데 무서울 정도로 시끄러웠던 건 사실이야) 마지막 가는 길에 내 마음을 덥혀주고 떠나줘서 고마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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